[영웅 안중근을 기리며⑤] 안중근의 뤼순 법정 담판과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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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안중근을 기리며⑤] 안중근의 뤼순 법정 담판과 유언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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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뤼순 법정서 하얼빈 의거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 유지...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상도 당당하게 밝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뤼순고등법원 제1호 법정에서 안중근 최종 사형 판결

영국 더 그래픽지 "30세의 청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시키고 당당히 법정 나섰다” 대서특필

하얼빈 의거 "일제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심판의 장...뤼순 법정 담판은 세계를 향한 안중근의 마지막 독립전쟁"

안중근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외로운 장부의 길을 걸었고, 독립을 향한 의(義)로운 투쟁은 슬픔과 아픔, 분노를 초월한 거룩한 성자" 평가
안중근 의사/ 해동사 전시실
안중근 의사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마을 소재 해동사 전시실 소재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62) =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이자 계몽운동가이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고 32세의 나이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번 이야기는 안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 발자취를 찾기 위한 「제5편 안중근의 뤼순 법정 담판과 유언」이다.  

안중근 의사 영정과 오전 9시 30분에 멈춰있는 시계. 9시 30분은 1909년 10월 26일 아침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시간이다./장흥군 해동사 소재 [정성환 기자]
안중의 의사 동상/광주광역시 중외 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안중의 의사 동상/광주광역시 중외 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안중근 의사 숭모비/광주광역시 중외 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안중근 의사 숭모비/광주광역시 중외 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쇠사슬과 수갑이 채워진 채 호송되기 직전의 안중근 의사/해동사 전시실 [정성환 기자]
쇠사슬과 수갑이 채워진 채 호송되기 직전의 안중근 의사/해동사 전시실 [정성환 기자]
뤼순 법정에 선 하얼빈 의거 주역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출처=황현필 선생 유튜브 역사 강의]
뤼순 법정에 선 하얼빈 의거 주역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출처=황현필 선생 유튜브 역사 강의]

◆ 안중근의 뤼순 법정 담판

일본제국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의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9만여 통의 전보가 전 세계를 향해 발송되었다.

메이지유신을 성공으로 이끈 중심인물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일본제국의 영웅으로 급부상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아무런 힘도 없고, 나라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약소국 대한제국 청년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는 소식은 세계사적으로 놀랄만한 대사건이었다.

당시 러시아 세력권인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의 총격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당시 일본과 대립 관계에 있었던 러시아 정부는 정치·외교적으로 많은 부담을 안고 있었다.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돼 러시아 검찰관의 조사를 받고 있었던 안중근은 일제의 강압으로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으로 이송된다.

한편 ‘채가구 역’에서 기회를 노리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러시아 군인들의 불심검문에 걸려 권총이 발견되고 현장에서 체포돼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으로 압송되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사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일본 총영사관으로 이송된 안중근은 자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전쟁 중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음을 밝히고, 우덕순·조도선·유동화 등 동지들과 함께 하얼빈을 떠나 뤼순감옥으로 이송돼 일본 검찰관의 심문을 받아야 했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지자,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 운동이 일어났고, 수많은 국제변호사가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뤼순감옥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일본 법원은 안중근의 민선 변호인단 변호를 불허하고, 언론을 봉쇄한 채 일본의 형식적인 절차에 의해 일본인 관선 변호사가 변론을 맡아 재판을 진행했다.

또한,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는 안중근을 사형에 처할 것을 법원에 명령함으로써 공정한 재판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30일부터 1910년 2월 6일까지 진행된 25차례의 심문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유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고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교전 중 사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정정당당하게 밝힌다.

안중근은 1910년 2월 7일부터 2월 14일까지 속개된 6차례의 재판 심문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죽인 범죄자가 아니다. 나는 한국과 일본과의 전쟁에서 대한제국의 의군으로서 하얼빈에서 적을 공격한 후 포로로 붙잡혀 지금 이곳에 선 것이다. 나는 전쟁포로이기 때문에 뤼순 지방재판소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대한 의군의 참모 중장으로서 교전 중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붙잡혔으니 테러리스트나 일반 살인범이 아닌 전쟁포로로 대우하고 만국공법(국제법)에 따라 나를 판결해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또한, “나의 하얼빈 의거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것도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어도 자살할 생각은 없었다”라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목적과 이토 히로부미가 지은 15가지의 죄상을 당당하게 밝힌다.

◆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명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대한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해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 한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은데,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고메이 황제를 죽인 죄

이처럼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목적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를 당당히 밝히고 만국공법에 따라 판결하라고 요구한 안중근의 논리정연하고 정정당당한 태도에, 법정에 있던 모든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 변호사와 방청객들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안중근의 사형 선고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뤼순고등법원 제1호 법정에서 안중근 사형, 우덕순 징역 3년, 조도선 징역 1년 6개월, 유동하 징역 1년 6개월의 최종판결이 내려졌다.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평온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안중근의 재판과정은 전 세계로 타전됐고, 특히 재판과정을 지켜본 영국 기자는 “삼십 세의 청년 안중근이 제국주의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시키고, 재판의 승리자라는 월계관을 쓰고 당당히 법정을 나섰다”라며 세기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라고 영국의 ‘더 그래픽지’에 대서특필했다.

이처럼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일제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심판의 장이었고, 뤼순 법정에서의 담판은 세계를 향한 안중근의 마지막 독립전쟁이었다.

◆ 동포를 향한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동포에게 고함〉.

“내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해외에서 모진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으니, 우리 2천만 형제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한이 없겠노라.”

안중근은 안병찬 변호사에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언을 전달했고, 그 유언은 국내 여러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안중근 의사 유묵 개선(凱旋)/ 이 유묵은 조소앙이 지은 ‘유방집’에 실린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다. 개선(凱旋)의 뜻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정의롭고 필연적인 임무를 마치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이 옥중에 와있다는 뜻으로 장부의 기개(氣槪)가 충만한 유묵이다. [출처=네이버]
안중근 의사 유묵(사람이 죽기 전 남긴 그림이나 글) 개선(凱旋)/ 이 유묵은 조소앙이 지은 ‘유방집’에 실린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다. 개선(凱旋)의 뜻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정의롭고 필연적인 임무를 마치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이 옥중에 와있다는 뜻으로 장부의 기개(氣槪)가 충만한 유묵이다. [출처=네이버]

 

안중근 의사 유묵 개선(凱旋)/사진 출처 네이버

이 유묵은 조소앙이 지은 ‘유방집’에 실린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다.

개선(凱旋)의 뜻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정의롭고 필연적인 임무를 마치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이 옥중에 와있다는 뜻으로 장부의 기개(氣槪)가 충만한 유묵이다.

안중근의 유언/광주광역시 백범 김구 기념관 전시실 소재. 1910년 여순감옥에서 사형 집행 전 두 동생과 빌렘 신부에게 마지막 유언하는 안중근 [정성환 기자]
안중근의 유언/광주광역시 백범 김구 기념관 전시실 소재. 1910년 여순감옥에서 사형 집행 전 두 동생과 빌렘 신부에게 마지막 유언하는 안중근 [정성환 기자]

◆ 가족에게 남긴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거든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조국의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 장사지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도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모두

국민 된 의무를 다하고

힘을 다해 독립을 이루라고 전해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르리라.

안중근은 순국하기 보름 전 면회 온 정근·공근 두 아우로부터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를 건네받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린다.

안중근은 두 아우에게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어머니에 대한 불효의 죄를 전하라”하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응칠 역사〉 필사본/현재 널리 읽히고 있는 〈안응칠 역사〉는 1969년 일본인이 일본어로 남긴 필사본〈안중근 자전〉을 토대로 한 것이다. 안타깝게 안중근의 친필 원고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출처=다음]

◆ 안응칠 역사(安應七曆史)

안응칠은 안중근의 어릴 때 이름(아명)이다. 안중근은 연해주로 건너와 독립전쟁을 하는 동안 ‘응칠’이란 이름을 꾸준히 사용해 ‘중근’이란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안응칠 역사〉는 뤼순감옥에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기록해 후세에 남긴 자서전적인 옥중 수기이다.

안중근은 사형 선고를 받은 2월 12일 하루 전부터 자신의 일대기인 〈안응칠 역사〉를 쓰기 시작해 순국하기 10일 전인 3월 15일 〈안응칠 역사〉 집필을 완성했다. 안중근 의사 순국 이후 친필 〈안응칠 역사〉 원본은 사라지고 없었으나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필사본이 일본에서 공개되자 1970년과 1979년,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 〈안중근 의사 자서전〉이란 책으로 번역·간행했다.

내용은 목차 없이 1879년 탄생부터 성장 과정, 동학당과의 전투, 천주교 입교, 국내에서의 교육 계몽운동, 연해주 망명, 국내 진공 작전과 단지동맹,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일제 검찰의 심문과 일제 재판관의 공판과정 등 자신의 일대기를 담았다.

동양평화론/1910년 3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미완의 책 [출처=네이버]
동양평화론/1910년 3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미완의 책 [출처=네이버]

◆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동양평화론〉은 1910년 3월 안중근이 뤼순감옥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극동평화론〉을 비판하며 사형 집행 전까지 집필한 논문 형식의 논설이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위해 사형 집행을 한 달 늦춰달라고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부탁해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는 안중근의 소박한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고, 서둘러 형을 집행함으로써 〈동양평화론〉은 미완성 논문으로 남게 된다.

〈동양평화론〉이 서론(序論),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으로 구성된 걸 보면 안중근은 이미 〈동양평화론〉에 대한 구상을 끝마치고 1개월쯤이면 이 논책을 완성할 것이라고 예상했음을 알 수 있다.

다행스럽게 <동양평화론> 서론과 전감 초반부의 글이 남아있고, 안중근 의사와 ‘히라이시’ 고등법원장과의 면담기록이 보존돼 있어 〈동양평화론〉에 담긴 안중근의 사상과 철학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천황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라고 약속했지만,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동양평화’ 유지와 ‘대한독립’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대한제국을 억압해 강제로 조약을 맺고 국권을 빼앗아 동양평화의 원흉이 되어 대한제국의 원수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안중근은 일본제국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가 이웃 나라를 침략해 일본의 식민지로 삼은 것을 심판하기 위해 “동양평화를 위한 의(義)로운 전쟁을 하얼빈에서 개전(開戰)하고, 담판(談判)의 자리를 뤼순으로 정한 것이다”라며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를 위한 의(義)로운 전쟁으로 규정했다.

안중근은 이 논설에서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도와 동양평화를 이뤄야 한다”라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에 대응하는 자신의 동북아 평화에 대한 철학과 구상을 담아내 일본의 반성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촉구한다.

사형장에서 안중근의 최후발언도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앞으로 한·일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였다.

또한, 안중근은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와의 면담에서 한·중·일 3국이 뤼순에 ‘동양평화회의기구’를 설치해 공동으로 관리하고, 3국 공동은행설립, 3국 공동평화군 창설 등 동양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한·중·일 3국은 서로 대등하게 평화를 지향하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희망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 EU(유럽연합) 형태의 동아시아판 한·중·일 평화체제 구상론으로, 안중근은 이미 100여 전 〈동양평화론〉에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안중근은 동양 전체의 평화를 꿈꿨던 위대한 사상가요 정치적 철학을 겸비한 선각자였으며, 국권 회복을 위해 교육계몽 운동, 의병 전쟁, 요인 암살 등 항일투쟁을 실행한 탁월한 실천가였다.

◆ 하얼빈 의거에 대한 평가

안중근은 뤼순 법정에서 일본검사·재판관들과 담판 지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야만 했던 정당함과 대한제국을 침략한 일본제국의 부당함을 당당히 밝히고 대한제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폭로했다.

뤼순 법정과 감옥에서 보여준 안중근의 위풍당당한 태도와 철학에서 품어나오는 논리정연한 정치적인 감각은 일본인 재판관·검사·변호사·간수·일본 헌병·방청인들의 감화였고, 그들의 경외에 찬 눈빛은 안중근을 향한 존경심이었다.

이처럼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와 일제에 대한 하얼빈 심판도 위대했지만, 뤼순감옥과 법정에서의 담판은 더 위대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직후 대한제국의 황후 순종의 비 큰아버지인 윤덕영과 최고의 친일파 이완용 등은 급히 하얼빈 영사관으로 찾아가 안중근이 일제에 잘못했다고 두 손 모아 빌어보지만, 화가 난 일본 관료들은 이들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다는 슬픔에 취한 이들은 기부금을 거둬들여 국민 사죄단을 만들고, 이토 히로부미 송덕비를 세워 추도회를 열었다고 하니 모든 국민이 분통을 터트리며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국지사 매천 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소식을 듣고서도 사람들은 밖에 나가 서로서로 껴안고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집안에서 모두 다 감격에 겨워 흐느껴 눈물 흘리며 기뻐했다”라고 암울한 일제강점기의 분위기를 상세히 기록했다.

지금도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문제 등 일본과 첨예하게 대립 된 상황에서 일본의 잘못된 과거 문제를 진정성 있게 반성하라는 피해자들의 요구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없는 일본의 비인륜적인 태도에 대해 분노한 국민이 있는가 하면, 일본의 거짓된 파렴치한변명을 앞장서서 동조하고 따라가는 일부 지식인도 있다고 하니 이들이 윤덕영·이완용과 똑같은 친일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된 후, 천주교도로서 살인이라는 죄를 지었다며 천주교에서 파면당했고, 안중근의 처 김아려는 안중근에게 신앙을 심어준 친일성향이 강했던 빌렘 신부를 찾아가 마지막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괴롭힘을 당하게 하면서도,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외로운 장부의 길을 걸었던 안중근의 독립을 향한 의(義)로운 투쟁은 슬픔과 아픔, 분노를 초월한 거룩한 성자의 모습이었다.

 

<다음엔 이번 연재의 마지막 편인 ▲6편 천주교 품에 안긴 토마스(도마) 안중근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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