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안중근을 기리며④]···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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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안중근을 기리며④]···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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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1907년 조정대신 사주 고종황제 폐위와 군대 해산...전국 곳곳서 항일무장투쟁 들불처럼 일어나

안중근, 교육계몽 활동 중단하고 무장독립전쟁을 위해 연해주로 향해...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첫걸음

1909년 10월 26일 09시 30분 총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저격...“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

하얼빈 의거, 1920년대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 1930년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의 의열(義烈) 투쟁 계승...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초석 마련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해동사 전시실 [정성환 기자]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해동사 전시실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61) =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이자 계몽운동가이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고 32세의 나이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번 이야기는 안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 발자취를 찾기 위한 「제4편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이다.  

해동사 전경/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마을 소재 [정성환 기자]
해동사 전경/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마을 소재 [정성환 기자]
안중근 의사 영정과 전시 공간/해동사 [정성환 기자]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일정 지도. [출처=㈜교원]

◆ 하얼빈 의거 역사적 배경

1900년대는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유럽 강대국의 대항해 시대로 인도, 베트남, 필리핀 등 아시아 대부분은 이들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경제력과 근대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요동 반도와 타이완을 차지해 동양의 제국주의로 급부상한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침탈하기 위해 1905년 가쓰라-테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국제적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승인받음으로써 약소국 대한제국은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의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1905년 11월 7일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초대 통감에 취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외교권과 내정을 장악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대한제국을 일본식으로 근대화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일제의 근대화 작업은 겉으로는 대한제국 발전을 위한다는 대외적인 명분을 내세우지만, 안으로는 대한제국을 침탈하기 위한 발판이자 수탈이 목적이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가장 고심한 계략은 고종황제의 권한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고종황제가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대한제국이 주권국가임을 전 세계에 호소하고, 지방에서의 민중 봉기를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대한제국 직접통치를 결심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순종을 황제로 추대해 모든 국권을 일임받아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버린다. 고종폐위와 군대 해산조치로 인해 극에 달한 해산된 군인들과 국민의 분노는 항일운동으로 이어져 전국 곳곳에서 항일무장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의 사주를 받은 조정 대신들의 압력으로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가 강제로 해산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본 안중근은 항일투쟁노선을 바꾸게 된다.

안중근은 독립을 위해서는 총을 들고 직접 일본군과 싸우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안중근은 교육계몽 활동을 중단하고 무장독립전쟁을 하기 위해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향했고, 이것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첫걸음이었다.

◆ 하얼빈 의거의 시작

국내 진공 작전의 실패로 방황의 시간을 보낸 안중근은 1909년 9월 11인의 동지를 규합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며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었지만, 소수 인원으로 당장 항일 의열(義烈) 투쟁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추’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며 고심하던 안중근은 의열 투쟁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돌아다니며 의열 투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곧 하얼빈을 방문할 것이라는 뜻밖의 소문을 듣게 된다.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수 있는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였다.

1909년 10월 연해주 한인 신문사 〈대동공보사〉를 찾아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 목적은 러시아 재무장관 ‘고코프체프’를 만나 1909년 4월 30일 결정된 일본 정부의 한·일병합 방침을 매듭짓기 위함이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대한제국 침탈에 대한 야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안중근은 대한 의군 시절 두만강을 건너며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 우덕순을 만나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뜻을 모은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심판하는 마지막 전쟁터로 하얼빈을 택한 것이다.

하얼빈이라는 국제도시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국민적 영웅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다는 것은 세계사적인 대사건임엔 분명했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해,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반인륜적 국가임을 밝히고, 대한제국의 군인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목숨 걸고 독립전쟁을 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왼쪽부터). 거사 전 하얼빈 공원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해동사 전시실 [정성환 기자]

1909년 10월 21일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최재형과 〈대동공보사〉기자 이강의 지원을 받은 안중근은 우덕순, 러시아어 통역사 유동하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얼빈으로 향했다.

하얼빈 한인교민회장 김성백의 도움을 받아 하룻밤을 지낸 안중근은 다음 날 아침 우덕순·조동하와 함께 하얼빈 공원 인근 사진관에 들러 마지막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나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시내를 돌아다녔지만, 신문과 잡지 등 그 어디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초조한 심정으로 김성백의 집으로 돌아온 안중근과 우덕순은 비문 강개한 마음에 붓을 들어 자신들의 심사를 붓을 들어 써 내려간다.

 

▲우덕순에게 보낸 안중근의 장부가(丈夫歌)

사나이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나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때를 만드는구나.

천하를 바라보니, 어느 날에 뜻을 이룰까.

동녘 바람은 날로 차가운데, 나의 가슴은 뜨겁기만 하구나.

지난 분함은 떨쳐버리고 반드시 뜻을 이루리라.

저 도적을 대함이여 어찌 목숨을 보전하리오.

동포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루소서.

만세, 만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우덕순이 안중근에게 화답한 시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이토 히로부미)를 만났도다.

너를 한 번 만나고자 일평생 원했지만,

… … (중략) … …

너뿐인지 알지마라, 너의 동포 오천만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보는대로 내 손으로 죽이리라.

안중근(安重根)의 청년 시절(좌) 하얼빈 의거 전(중), 의거 후(우)/해동사 전시실 [정성환 기자]
안중근(安重根)의 청년 시절(좌) 하얼빈 의거 전(중), 의거 후(우)/해동사 전시실 [정성환 기자]

1909년 10월 24일 아침 안중근은 러시아 통역사 조도선을 만나 우덕순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의 일정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하얼빈역에서 제일 가까운 채가구 역으로 향했다. 채가구 역은 열차가 서로 교차하는 역으로 열차가 정차할 때면 승객들이 밖으로 나와 휴식을 취할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채가구 역에 정차한다면,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 밖으로 나와 휴식을 취할 것이고, 그 시간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수 있을 것이라 안중근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채가구 역에서 정차할지, 아니면 그냥 지나칠지는 의문이었다.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에게 역할분담을 제의한다.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 역에서,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거사하기로 뜻을 모으고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향했다. 이 같은 안중근의 결단은 하얼빈 거사 성공의 시작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박영선 작/출처=네이버]
안중근 의거 장면도(작가 미상) [출처=네이버]
안중근 의거 장면도(작가 미상)/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체포된 안중근의 의거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당시 일본신문에 실렸다. [사진 출처=네이버]
이토 히로부미 주치의가 그린 진단 도면 [사진 출처=다음]
이토 히로부미 주치의가 그린 진단 도면/이토 히로부미의 심장과 복부에 3발의 총탄이 박혔다. [사진 출처=다음]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최신식 자동권총(브라우닝 M1900) [사진 출처=네이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최신식 자동권총(브라우닝 M1900) [사진 출처=네이버]

◆ 안중근의 하얼빈 심판

1909년 10월 26일 마침내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운명의 날이 밝아오고,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는 장춘을 떠나 하얼빈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가 죽음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아침 7시경 마지막 전투를 위해 7연발 최신식 자동권총(브라우닝 M1900)을 품에 숨기고 한인교민회장 김성백의 집을 나와 하얼빈 역으로 향했다. 두만강과 시베리아 들판에서 가열차게 목숨걸고 싸웠던 전쟁을 끝내야 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 시각 하얼빈 역 주변은 러시아 경비병들과 일본인 환영객들로 무척 붐빈 가운데 안중근에겐 희소식이 들려왔다. 러시아 경비병들이 하얼빈 총영사관의 요청으로 일본인들이 하얼빈 역에 입장할 때 몸수색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입장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돌이킬 수 없는 최대 실수였다.

“그 누구도 천하무적 일본에 대항할 자 아무도 없다”라는 일본의 자만은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일본인 행세를 하며 아무런 검색도 받지 않고 역 구내 찻집으로 들어선 안중근은 차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미 역 플랫폼에는 중국 군악대와 러시라·중국 의장대들이 정열해 있었고, 동원된 일본 교민들이 몰려와 무척 소란스러웠다.

9시가 가까워지자 특별열차의 기적 소리와 함께 군악대 연주가 시작되었고, 이토 히로부미의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오전 9시 하얼빈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조용히 일어나 이토 히로부미가 내리고 있는 플랫폼으로 향했다.

역 광장에는 각국 영사단, 일본인과 러시아인, 중국인 등 수천 명이 양국 수뇌를 환영하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신변경호를 위해 러시아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러시아 재무장관 코프체프 일행이 열차에서 내려 사열대를 향하자 군중들이 러시아 국기와 일장기를 흔들며 환영했고, 군악대 연주와 일본인들의 만세 소리가 하얼빈 역에 울려 퍼졌다. 마침내 하늘이 마련해준 운명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안중근은 망설이지 않고 사열하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걸어나갔다.

마침내 운명의 순간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총성과 함께 뜨거운 감격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

중절모를 쓴 백발의 노신사는 가슴에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고꾸라졌고, 나머지 일본인들 역시 피 흘리며 쓰러졌다. 안중근의 신기에 가까운 사격 솜씨가 불을 뿜은 순간이었다. 안중근은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라 굳게 믿었다.

총소리에 놀란 수천 명의 군인과 환영인파가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고 하얼빈역은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순간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을 향해 달려들었고, 안중근은 가지고 있던 총을 공중을 향해 힘껏 던져 버렸다.

안중근은 하얼빈 1차 전쟁의 승리를 확신했으며, 이제는 이곳에서 살아남아 일제의 만행을 재판정에 세워 국제사회에 알려야 할 2차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자살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내가 도망칠 줄 아느냐, 내가 도망칠 생각을 했다면 죽음터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뿐,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포승줄에 묶인 채 의연한 모습으로 하얼빈 역을 걸어나갔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하얼빈 역을 이토 히로부미를 심판하는 전장으로 삼아 적의 수괴 이토 히로부미를 전투 중 사살한 것이다.

이처럼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의(義)로운 전쟁을 하얼빈 역에서 시작한 것이다.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이토를 향해서 쾌사로 네 발을 발사하고 뒤따라오는 수행원에게 세 발을 연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통쾌하고 기쁜 마음으로 네 발을 최대한 빨리 연속으로 발사하고, 다시 세 발을 일본인을 향해 한 발씩 한 발씩 연속으로 확인 사격을 했다는 것으로 안중근의 놀랍도록 확신에 찬 사격 솜씨였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는 복부와 오른쪽 심장에 세 발의 총탄을 맞고 30분 만에 68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가와카미, 비서관 모리, 만주철도 간부 다나카가 등 일본인 세 명도 중상을 입었다.

러시아 헌병들에게 붙잡혀 구금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올린다.

1909년 10월 26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담대하고 숭고한 하얼빈 의거의 정신은 1920년대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과 1930년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의 의열(義烈) 투쟁으로 계승되어 1940년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속 군대인 ‘한국광복군’이 결성되는 초석이 되었고,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기원이 된다.

 

<다음엔 ▲5편 안중근의 뤼순 법정 담판과 유언 ▲6편 천주교 품에 안긴 토마스(도마) 안중근> 편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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