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안중근을 기리며①]...장흥 해동사(海東祠)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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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안중근을 기리며①]...장흥 해동사(海東祠)를 찾아서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3.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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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사, 안중근 의사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전국 유일 항일 역사 체험 교육장

장흥군과 전남도내 유림, 죽산안씨 등 도움, 1955년 장흥군 만수사 옆 사당에 안중근 의사 위패 모셔

어려서부터 강직, 학문보단 말타기와 사냥 등 무술연마 즐겨, 특히 사격술 '일품'...후에 이토 히로부미 총살

동학농민혁명 때 백범 김구와 첫 인연...안중근 두 동생과 후손들도 김구 도와 임시정부와 광복군 활동

19세 때 천주교 만민평등 사상 접하고 천주교 받아들였지만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은 키워가...
안중근(安重根, 1879~1910).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고 32세의 나이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정성환 기자]
안중근(安重根, 1879~1910).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고 32세의 나이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58) =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이자 계몽운동가이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고 32세의 나이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번 이야기는 안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 발자취를 찾기 위해 ▲1편 장흥 해동사 ▲2편 안중근의 항일무장투쟁 ▲3편 단지동맹과 하얼빈 의거 ▲4편 안중근의 유언과 순국 순으로 연재한다.

 

◇ 안중근 의사를 기리며...[제1편] 장흥 해동사(海東祠)를 찾아서

 

해동사/2000년 건립/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마을 소재 [정성환 기자]
해동사/2000년 건립/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마을 소재 [정성환 기자]
해동사(만수사 우측 1칸 건물)/1955년 건립 [정성환 기자]
해동사(만수사 우측 1칸 건물)/1955년 건립 [정성환 기자]
해동사/안중근 의사 영정/해동명월(海東明月) 편액 [정성환 기자]
해동사/안중근 의사 유묵 전시공간 [정성환 기자]
해동사/안중근 의사 영정/해동명월(海東明月) 편액 [정성환 기자]

 

◆ 전국에 하나뿐인 안중근 의사 사당 해동사(海東祠)

정남진이라 불리는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만수마을에는 대한민국에서 하나뿐인 안중근 의사 추모 사당인 해동사(海東祠)가 만수사(萬壽祠) 경내에 세워져 있다.

‘만수사’는 죽산안씨 문중에서 고려 후기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유교를 도입하는 데 공이 컸던 안향(1243~1306)을 중심으로 선조들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제례 공간으로 1951년 세워졌다.

이후 같은 뿌리인 순흥 안씨 안중근의 후손이 국내에 살고 있지 않아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안홍천(전, 장흥향교 전교 1895~1994) 씨가 안중근 의사 사당 건립을 추진하게 된다.

이에 장흥군을 비롯한 도내 향교의 유림과 죽산안씨 문중과 뜻을 같이한 지역유지들의 도움으로 1955년 만수사(萬壽祠) 바로 옆에 한 칸짜리 사당을 지어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모셨는데 이 사당이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안중근 의사의 기념시설인 해동사(海東祠)의 탄생이다.

이 무렵 대통령 이승만은 안중근 의사의 사당 건립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고 쓴 편액을 증정한다.

해동(海東)은 우리나라를 뜻하고 명월(明月)은 밝은 달이니, 대한민국을 밝게 비추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에 문중과 유림은 ‘해동명월’의 글을 따 사당 이름을 ‘해동사(海東祠)’라 짓고, 1955년 10월 27일 안중근 의사의 딸 안현생 씨와 5촌 조카 안춘생 씨가 참석한 가운데 위패봉안식을 거행했다.

‘해동사’가 창건된 지 40여 년이 지난 이후, 1칸으로 지어진 해동사의 규모가 안중근 의사의 공적에 비해 너무 왜소하다는 의견이 있었고, 이에 따라 문중과 유림, 지역민들이 1996년 만수사 아래에 터를 마련해 안중근 의사 순국 90주년인 2000년 3칸이 맞배지붕으로 새로 사우를 지은 것이 지금의 ‘해동사(海東祠)’이다.

해동사에는 모두 3점의 안중근 의사 복제 유묵이 전시돼있다.

안중근 의사 유묵은 200여 점으로 알려져 있으나 존재가 확인된 작품은 60여 점으로 유묵의 대부분은 사형이 선고된 1910년 2월 14일 이후에 쓴 것이라고 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출처=네이버 캡처 [정성환 기자]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출처=네이버 캡처

 

◆ 안중근의 유년시절

안중근(1879~1910)은 1879년(고종 16)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안중근 가문은 고려말 대 유학자 안향(1243~1306)의 후예로 무과 급제자만 7명이 나올 정도로 명망 있는 무반 가문이었다. 진해 현감을 지낸 할아버지 안인수는 해주 일대의 대지주로 미곡상을 경영한 재산가였으며 부친인 안태훈은 유년시절부터 황해도 일대에서 신동으로 불리며 소과에 합격한 진사였기에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부유한 삶을 보냈다.

안중근은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을 닮은 7개의 흑점이 있어 할아버지 안인수는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았다 하여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지었는데, 응칠은 어릴 때부터 성질이 가볍고 급해 부모님이 세상을 가볍게 살지 말고 행실을 무겁게 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중근(重根)이라 개명했다고 한다.

안중근은 1907년 망명 이후에도 1910년 순국할 때까지 ‘응칠’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며 여순감옥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집필한다.

그의 부친 안태훈은 개화파 박영효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일본 유학자로 선발한 70명 중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개화를 주장한 깨어있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1884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많은 급진개혁파 지식인들이 살해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와 뜻을 같이했던 안태훈 역시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안태훈을 살리기 위해 황해도 해주를 떠나 일가와 함께 당시 일곱 살이던 안중근을 데리고 황해도 신청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해 정착한다.

이후 안중근은 8세 때인 1886년부터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8~9년 동안 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유교 경전 등 한학과 조선의 역사를 배우고, 부친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과 개화사상에 눈뜨게 된다. 또한 안중근은 무인 기질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뜻하는 바가 있으면 그 주장을 굽히지 않은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특히 그는 학문하는 것보다 말타기와 사냥을 즐기며 무술연마를 더 즐겨해 화승총을 쏘아 20보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힐 정도로 사격술은 일품이었다고 한다.

 

백범 김구와 도마 안중근/출처=황현필 역사 youtube
백범 김구와 도마 안중근/출처=황현필 역사 youtube

 

◆ 안중근, 백범 김구와의 만남

이처럼 문인으로서의 근대적 개화사상과 무인으로서의 기상을 겸비한 청년으로 성장한 안중근은 16세 되던 해인 1894년 한 살 연상인 김아려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그해 안중근은 조선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맞서 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조선 역사상 최대의 농민봉기인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대사건을 접하게 된다. 당시 동학농민혁명은 신분제도에 반발한 반 봉건적 요소가 강했다.

노비 문서를 소각하라.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애라. 탐관오리를 처단하라. 횡포한 부호와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처벌하라는 등의 동학 농민군들의 요구사항은 양반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이에 지방양반층과 향리층들은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스스로 ‘민보군을’ 결성하고 관군과 일본군과 연합해 동학 농민군들과 교전하게 된다.

이때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황해도 관찰사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동학 농민군 진압에 나서게 되는데, 이때 16세였던 안중근 역시 아버지를 따라 동학 농민군과의 전투에 참여해 어려서부터 익힌 무예와 병법, 담대한 용기와 탁월한 지략과 기습작전으로 뛰어난 통솔력을 펼치며 역사의 현장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 동학 농민군은 관청을 습격해 많은 일본인을 처단하기도 했지만, 일부 동학 농민군 중에는 행패를 부리고 약탈하는 무리가 있었다고 한다.

안중근은 그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동학 농민군이 외세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관리를 죽이고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나라에 불충한 반란이기에 진압에 나선 것이다”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당시 안중근은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으로 목숨 걸고 동학 농민군 진압에 나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동학 농민군에는 황해도 동학 접주 19세의 청년 김구가 있었다.

김구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안중근과 고향이 같았고 안중근보다 3살 위였다. 당시 함경도에는 1894년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이 대패하자 각 고을의 동학 농민군 잔여 세력이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며 최후 항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이때 김구의 인물 됨됨이를 높이 평가했던 안태훈은 김구에게 “너희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도 너희를 공격하지 않겠다”라는 밀서를 보낸다.

이후 안태훈과 김구의 직접 교전은 없었지만, 김구가 해주성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대패해 도망자 신세가 될 때, 안태훈은 김구를 찾아 자신의 집에서 머물게 한다. 이때 안중근은 세 살 위인 김구를 처음 만나 형제처럼 깊은 교감을 나누게 되었고, 이러한 인연으로 안중근의 두 동생(정근,공근)과 그 후손들도 상해임시정부에서 김구를 도와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백범 김구는 “안중근은 여러 군인 중에서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기술이 있었다”라고 안중근의 뛰어난 사격술을 〈백범일지〉에 기록했으며, 백암 박은식 선생의 <안중근 전>에는 “안중근은 총명하고 경사와 서예에 통달해 서법에도 능했으며, 놀 때는 항상 말타기 연습을 하고, 사격술이 뛰어나 능히 마상에서 나는 새를 쏘아 떨구었다”라고 안중근의 어린 시절을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던 백발백중의 사격술은 유년시절부터 익힌 훈련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훗날 백범 김구는 어린 시절에 보았던 자신보다 어렸던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큰일을 해낸 것에 대해 평생 고마운 마음으로 살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일까, 김구는 안중근의 친동생이었던 안정근의 딸 ‘안미생’을 자신의 비서로 채용하고, 자신의 큰아들 김인과 결혼시킴으로써, 김구와 안중근 집안은 사돈 관계가 된다.

 

◆ 천주교 신자 토마스(도마) 안중근의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안태훈에게 위기가 몰려온다. 안태훈의 산포군이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동학 농민군들이 해주 감영에서 빼앗은 양곡 천여 가마를 몰수해 산포군의 군량미로 사용했는데, 1896년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 내각의 개화파가 무너지고, 탁지부 대신 어윤중과 민영준(민영휘) 등 친러세력의 수구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안태훈에게 군량미 천여 가마를 돌려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에 안태훈은 모든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사실을 알아보니 조정의 대신들이 자신을 반역죄로 몰아세운다는 것을 알게된다.

위기에 몰린 안태훈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급히 종현 성당(현재의 명동성당)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성당은 프랑스 신부들이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 많은 신부와 외국인이 거주한 치외법권지역으로 안전한 곳이었다.

수개월 동안 성당에 피신한 안태훈은 자연스럽게 천주교리를 접하게 되고 프랑스 빌렘(홍석구)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 신자가 된다.

이후 안태훈은 빌렘 신부 등 천주교 신부들의 도움을 받아 양곡 반환문제를 해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가족 30여 명을 천주교에 입교시킨다.

이때 19세였던 안중근은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만민평등 사상을 접하고 가슴 깊이 천주교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프랑스 신부 ‘빌렘’에게 토마스(도마)란 세례명을 받고, 선교사업과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서양의 신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안중근은 천주교 입교를 통해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되었고, 신앙생활에서도 항상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을 행동윤리로 삼으며 천주교를 전파하는데 열과 성을 다한다. 1899년(21세)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천주교 전도활동을 하던 안중근은 우리 민족의 교육 수준이 낮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안중근은 우리 민족이 세계정세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도 서양의 신교육을 받아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민중 계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뮈텔’ 주교를 만나 대학설립을 논의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뮈텔’ 주교를 만난 안중근은 “조선인을 위해 대학을 세워 천주교인들을 교육하면 우리나라에 큰 힘이 될 것이다”라고 대학설립을 부탁하지만, 뮈텔 주교는 대학설립 요청을 단호히 거절한다.

뮈텔 주교는 “조선사람들이 학문을 탐구하고 지식을 쌓으면 천주교 교리와 신앙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고, 신앙심이 없어져 자연히 하느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며 조선사람들이 학문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분노한 안중근은 외국인 신부에 대한 불신을 가슴에 안고 고향으로 돌아와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 사람의 마음은 믿을 것이 못 된다”라며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을 중단하고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키워나가지만, 천주교에 대한 신념과 신도들에 대한 깊은 사랑은 버릴 수가 없었다.

 

「2편 안중근의 항일무장투쟁」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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