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이야기] "광주 광산, 무양서원(武陽書院)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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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야기] "광주 광산, 무양서원(武陽書院)을 찾아서"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12.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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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전국 유림 호응 등으로 서원 건립 논의 활발
1927년 탐진최 씨 문중 무양서원 건립...탐진최 씨 시조 최사전 등 다섯 분 배향
무양서원, 광산구 무량중학교(현, 비아중학교) 설립, 지방 교육의 뜻 이어와

 

무양서원(武陽書院)=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광주광역시 월계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서원(武陽書院) 전경.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광주 월계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55) = 서원(書院)이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 운영 기구다. 

이번 편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쌍암동에 무량중학교(현, 비아중학교)를 설립, 지방 교육의 뜻을 이어오고 있는 광주 도심 속의 서원 "무양서원을 찾아서다."

◆ 무양서원

1919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금석총람 金石總攬>에 최사전의 묘지석이 일본 동경제국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이 확인되자 탐진 최씨 문중과 유림, 전라남도가 반환을 요구해 1921년 최사전의 묘지석을 환수하자 이를 계기로 전국 유림의 호응으로 서원 건립 논의가 이뤄지고 1927년 탐진최씨 문중이 현 위치(광주 광산구 첨단지구 월계동)에 무양서원을 세우게 된다.

환수된 묘지석은 무양서원에서 보관해 오다 안전한 영구 보전을 위해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무양서원(武陽書院)은 고려 인종 때의 어의 장경공 최사전(崔思全)을 주벽으로 그의 후손인 손암 최윤덕(孫菴 崔允德), 금남 최부(錦南 崔溥), 문절공 유희춘(柳希春), 충렬공 나덕헌(羅德憲) 등 다섯 명을 배향한 서원이다.

무양서원은 광주의 옛 이름 무진주의 무(武)와 볕을 뜻하는 양(陽)을 더해 ‘무진주의 볕’ 즉 광주의 볕이라는 뜻의 무진지양(武珍之陽)에서 비롯된 서원 이름이라 한다.

무양서원 입구/광주광역시 월계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서원 입구/광주광역시 월계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서원의 외삼문/합인문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서원 외삼문/합인문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서원 외삼문/합의문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서원 외삼문/합의문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서원 강당/이택당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서원 강당/이택당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자원 동재/성지재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서원 동재/성지재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자원 서재/낙수재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서원 서재/낙수재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서원 사당/무양사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서원 사당/무양사 [사진=정성환 기자]

◆ 무양서원 공간구성

무양서원의 공간 구성을 보면 일반 서원과 거의 유사하지만 외삼문에 해당하는 합의문(合義門. 왼쪽 문)과 합인문(合仁問, 오른쪽 문)이 이택당(以澤當) 양쪽에 세워진 것이 특이하다.

이택당(以澤當)은 강당이다. 이택(以澤)은 서로 붙어있는 두 개의 연못이라는 뜻으로 벗이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준다는 의미라고 한다.

합인문(合仁問)을 들어서면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성지재, 誠之齋)와 서재(낙호재, 樂乎齋)가 있다.

서원 중앙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인 삼오문(三五門)이 있다.

삼오문(三五門)은 사당인 무양사로 들어가는 정문으로 삼강오륜(三綱五倫)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삼오문(三五門)을 들어서면 사당인 무양사(武陽詞)가 있다.

무양사(武陽詞)는 최사전을 주벽으로 그의 후손인 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 충렬공 나덕헌 등 다섯 명을 배향하고 있다.

매년 음력 9월 6일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무양서원 담장 너머엔 탐진 최 씨 사세오위단(四世五位壇)이 조성되어있다.

사세오위단(四世五位壇)은 최철, 최정, 최사전, 최변, 최효인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쌓은 단으로 음력 3월 6일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내삼문(三五門)/무양서원 묘정비(무양서원의 내력을 새긴 비석) [사진=정성환 기자]
내삼문(三五門)/무양서원 묘정비(무양서원의 내력을 새긴 비석) [사진=정성환 기자]

 

◆ 무양사에 배향된 다섯 분

① 장경공 최사전(崔思全, 1067~1139, 고려 인종)

최사전은 탐진 현, 지금의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최사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의술로 관직 생활을 이어온 집안에서 자랐다.

탐진 최 씨의 시조인 최사전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곧으며 지모가 뛰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의술에 능통해 15세에 고려 13대 왕 선종의 부름을 받아 조정에 출사하게 된다.

‘선종’은 최사전에게 “의술은 정의로 통하고, 십전(十全)이라는 약이 으뜸이라, 의원은 마땅히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는 것(십전, 十全)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대가 바로 최고의 의원이 될 것이다”라며 사전(思全)이라는 이름을 친히 써서 내려주었다고 한다.

그는 의술로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고려 시대 내의(內醫)로서 예종의 등에 난 부스럼을 가볍게 보고 치료하지 않은 죄로 2년간 유배되어 풀려나기도 했다.

1126년(인종4)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 인종이 위험에 처하자, 인종을 도와 이자겸의 심복 척준경을 설득해 이자겸을 제거하고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최사전은 공신이 되어 병부상서(정3품)를 지낸 후 중서문하성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정2품)에 올랐으며, 고향인 강진에서 최고급의 청자가 생산되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고 시호는 장경(莊景)이다.

② 손암 최윤덕(崔允德)

최윤덕은 고려 시대 영도 첨의(종1품) 벼슬을 하던 중 조선이 건국된다.

최윤덕은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은거했다. 그러던 중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 등이 찾아오자 시를 지어 당시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후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자 지금의 광산(광주)에 유배되었다. 자손들에게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고 벼슬을 하지 말라”라는 경계의 말을 남겨 지조와 충절을 중시한 탐진 최 씨의 가풍을 세웠다고 전한다.

최부의 길/나주시 동강면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최부의 길/나주시 동강면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최부의 이동 경로 석비 /나주시 동강면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최부의 이동 경로 석비 /나주시 동강면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한반도 지형을 닮은 영산강의 U자 모양에 자리한 나주 느러지 마을 [사진=정성환 기자]
한반도 지형을 닮은 영산강의 U자 모양에 자리한 나주 느러지 마을 [사진=정성환 기자]

③ 충렬공 금남 최부(崔溥, 1454~1504, 성종~연산군)

금남 최부는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본관은 탐진(耽津), 호는 금남(錦南), 아버지는 진사 택(澤)이다.

해남 정 씨와 결혼해 처가인 해남에서도 살았다.

그의 호 금남(錦南)은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의 금(錦)과 해남의 남(南)을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강직하고 청렴한 선비로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김굉필과 교유하고 1482년 문과에 급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1485년 서거정 등과 〈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하여 논(論) 120편을 집필했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고 1487년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이 되어 제주에 파견되었다.

1488년 제주도에 부임한 이후 부친의 부음을 듣고 나주로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다.

43명의 일행과 함께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해적을 만났으나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기며 14일간의 표류 끝에 명나라 해안가에 도착해 명나라 관리들의 보호를 받으며 베이징(北京)으로 향했다.

최부는 베이징으로 가는 동안 명나라 곳곳의 산천, 풍속, 문물 등을 상세히 기록한다.

최부는 북경에 도착해 황제를 만나 환대를 받고 5개월 만에 귀국길에 오른다.

그가 귀국하자 성종은 8,000리 길을 거쳐온 중국 땅에서의 견문을 기술하여 바치도록 명한다.

그는 8일 동안 일기 형식의 『표해록(漂海錄)』 3권을 집필해 성종에게 올렸다.

표해록은 제주도에서 부친상을 접하고 나주로 출발,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하다 중국에 도착한 후 43명이 무사히 귀환하기까지의 6개월간의 여정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는 중국 연안의 해로, 기후, 산천, 도로, 관 부, 풍속, 민요 등이 소개되어있으며, 최부의 「표해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일본 승려 에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중국 3대 여행기로 평가받는다.

최부는 너무나 대쪽 같은 선비였다. 사리사욕과 방탕 그리고 무사안일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강직한 선비였다.

1497년(연산군3) 사간원 사간(종3품)이었던 그는 훈구대신과 임금의 종실과 외척 그리고 후궁과 환관들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심지어 연산군의 잘못까지도 낱낱이 거론하며 비판했다.

결국, 최부는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붕당을 조직해 국정을 비방했다는 모함을 받아 함경도 단천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참형 당한다.

『연산군일기』에 그에 대한 졸기(卒記)가 기록되어있다.

“최부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에 능통해 문사(文詞)가 풍부했고,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바를 말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1506년 중종 즉위 후 신원(伸冤) 되어 도승지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렬’이다.

④ 문절공 미암 유희춘柳希春, 1513~157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미암(眉巖). 해남 출신으로 조선 시대 일상을 세밀하게 기록한 <미암일기眉巖日記>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가 금남 최부의 딸이며 부인은 여류문인인 송덕봉(宋德奉)이다. 하서 김인후의 딸이 그의 며느리로 ‘하서’와 사돈지간이다.

1538년(중종 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정6품)·사간원 정언(정6품) 전라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546년(명종 1) 을사사화 때 윤임 일파 제거에 협조하지 않아 윤원형과 임백령 등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고향인 해남으로 귀향했다.

1947년 양재역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옮겨져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1567년 선조 즉위년에 고봉 기대승의 도움을 받아 석방되어 성균관 대사성(정3품), 전라도 관찰사(종2품), 이조참판(종2품) 등을 역임했다.

외할아버지 최부의 학통을 계승한 유희춘은 귀향한 이후 하서 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을 이끌었다.

그의 저서 『미암일기』는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관직에 등용될 무렵인 1567년 10월부터 1577년 5월까지 11년에 걸쳐 미암 유희춘이 쓴 방대한 일기로 현재 보물 제206호로 지정되어있다.

좌찬성(종1품)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절(文節), 담양의 의암서원, 광주 무양서원에 배향되었다.

⑤ 충렬공 나덕헌(羅德憲, 1573~1640)

나덕헌은 나주 출신으로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우고 공신이 되었다.

1636년 외교적 수완이 능해 후금에 사신으로 갔을 때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淸)이라 하고 황제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할 때, 우리나라 사신에게도 황제(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할 것을 요구하자, 나덕헌은 “조선은 청과 형제의 나라지, 신하의 나라가 아니다”라며 이를 완강히 거부한 죄로 고초를 겪게 된다.

이후 조선으로 강제 호송된 나덕헌은 홍타이지가 인조에게 보낸 국서를 받아 청나라 지인에게 건네주고 귀국했는데, 황제를 칭한 오랑캐의 국서를 함부로 받았다는 이유로 삼사와 척화론자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 가게 된다.

1936년 병자호란이 끝난 이후 나덕헌은 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며 목숨을 걸고 청나라 태종에게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삼도통어사(종2품)에 제수된다. 그러나 나덕헌은 1639년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나주로 돌아와 은거했다. 정조 때에 이르러 충렬공(忠烈公)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고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무양사(사당) 협문 [사진=정성환 기자]
무양사(사당) 협문 [사진=정성환 기자]
사세오위단(四世五位壇)/무양서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사세오위단(四世五位壇)/무양서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서원 이야기

서원의 명칭은 당나라 현종 때 궁중에 있던 서적의 편수처(編修處)이던 집현전 서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송나라 때 지방의 사숙(私塾,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글방)에 조정에서 서원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을 시작으로 학교의 명칭이 되었다고 하며 송나라 주희(주자)의 백록동서원이 유명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 학자 ‘안향’을 배향하고 유학을 가르치기 위해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다.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조정에 사액과 전토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 때 ‘소수서원’ 쓴 편액(扁額, 간판)과 서적, 토지와 노비를 주고 면세·면역의 특권을 내렸다. 이것이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다.

조선의 서원은 그 성립 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기능과 성격 등 큰 차이가 있다.

중국 서원은 관인 양성을 위한 준비기구로서의 학교의 성격이 강했으나 조선의 서원은 양반자제를 가르치는 교육적 기능과 사림들의 정치적, 사회적 기구의 성격이 강했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을 제사 지내며 유교적 향촌질서유지, 시정을 비판하는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이 있었으나 서원이 증가하면서 혈연, 지연, 학벌, 사제, 당파 등과 연결되어 이익집단으로 변질됐다.

특히 사액서원은 향민을 착취하고 군역을 회피하는 장소로 이용돼 민폐가 심해지자 영조와 대원군은 많은 서원을 철폐하기도 했다.

무양서원은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으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탐진 최씨 문중에서는 서원의 교육 기능을 살려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량중학교(현, 비아중학교)를 설립해 지방 교육의 뜻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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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길열 2022-12-25 20:09:47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꼼꼼하고 자세히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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