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이야기⑧] 미국과 소련에 의한 우리 민족의 분열
상태바
[백범 김구 이야기⑧] 미국과 소련에 의한 우리 민족의 분열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2.11.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구 선생 광주 방문/전시실. [정성환 기자]
김구 선생 광주 방문/전시실.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 53] 정성환 전문기자 = 이번 이야기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외치고, 평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완전한 통일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중 「제8편 미국과 소련에 의한 우리 민족의 분열」이다. 

 

◆ 국제 사회의 한국 독립 약속

한반도 독립 문제는 광복 이전에 이미 열강들 사이에서 이미 논의되고 있었다.

1943년 11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총통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결의했다.

한국은 당시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국가로 이는 김구가 이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중국의 ‘장세스’의 도움을 받아 거둔 가장 큰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한이나 절차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적당한 시기’라는 초안 문구가 ‘적절한 절차’로 수정되어 발표됨으로써 ‘적절한 절차’라는 문구에는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국제 사회의 냉혹한 현실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중심엔 미국이 있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일본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한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요청했고, 소련은 참전을 약속했다. 그리고 얄타회담 6개월 후인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전세가 연합국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소련은 한반도의 전리품에 욕심을 품고 8월 8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단행한다.

그리고 전광석화같이 파죽지세로 만주를 점령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향했다. 소련의 남하에 다급한 미국은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소련 측에 남하하지 말라고 요구했고, 소련이 그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북위 38도 선은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분단은 원래 대한민국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얄타회담의 결과 패전국인 독일이 동·서로 분단된 것처럼 일본이 분단되어야 옳았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국보다 일본이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대한민국을 희생양으로 삼은 건 분명했다.

남한에서 미국의 전략은 미 군정 주도로 공산주의 체제를 타도해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한 것이었고, 소련의 목표는 자본주의를 몰아내고 공산주의 국가를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점령군으로 미군이 남한에 쳐들어오고, 소련군 역시 해방군으로 북한에 쳐들어왔다.

그리고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남한에서 창당한 인민공화국과 김구의 충칭 임시정부를 부정했다. 그리고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을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김구와 임정 요인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귀국한 김구는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해방 정국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간다.

그러나 김구의 의도와는 달리 해방 이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한 제2의 식민시대가 서서히 다가온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발표되고 대한민국은 찬탁과 반탁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며 좌우대립이 심화 되었다.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적 갈등이 격화된 또 다른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소련은 해방군이라 자청하며 북한을 간접 통치하면서 조만식 등 민족주의 인사를 대거 숙청하고 공산주의 김일성 정권수립을 지원했고, 미군은 점령군이라 자청하며 남한을 직접 통치하면서 김구의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일제강점기 관료·경찰과 친일파들을 대거 기용해 해방된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이처럼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의 길을 처음부터 막아버렸다.

동아일보 신탁통치안 왜곡 보도 기사/전시실 [정성환 기자]
동아일보 신탁통치안 왜곡 보도 기사/전시실 [정성환 기자]
신탁통치 반대시위/경교장/전시실 [정성환 기자]
신탁통치 반대시위/경교장/전시실 [정성환 기자]

 

◆ 우리 민족의 분열 신탁통치안

1945년 미국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국이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하고, 필요하면 5년을 연장할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에 반해 소련은 대한민국 국민이 먼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4개국이 후원한다는 안을 내놓게 된다.

합의안은 주로 소련 측의 의견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하기 위해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으머 이를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와 협의해서 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이 신탁통치할 것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 의한 임시정부의 수립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 정부와 협의를 거치지 않으면 신탁통치를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또한, 이 합의문의 ‘신탁통치’는 잠정적인 ‘후원’의 성격이 강했으며 미국이나 소련 일방이 아닌 4개국으로 규정되어 남·북 분단의 소지도 없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한 중요한 사항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수립이었고 신탁통치는 정부수립을 위한 부차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소식을 접한 우리 국민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일제 35년간의 식민 통치를 겪은 국민으로서는 감내하기 힘들었고 또다시 외국의 식민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기에 좌파 우파 모두 한목소리로 반탁운동에 앞장선다.

좌·우익 세력은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구성해 신탁통치의 부당함을 주장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중요내용을 분석한 좌익세력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이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현실적 방안이라며 찬탁으로 돌아서게 된다.

결국, 우리 민족은 신탁통치안을 놓고 우익과 좌익의 의견이 반탁과 찬탁으로 나뉘면서 극심한 대립을 가져왔다.

이러한 대립의 원인은 현대사를 뒤흔든 〈동아일보〉의 왜곡 보도 때문이었다.

1945년 12월 27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이라는 신탁통치에 관한 보도내용은 소련은 절대 악이고, 미국은 우리의 자주독립을 지지하는 정의의 국가로 묘사한 것으로 사실과 정면으로 배치된 기사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반도 신탁통치안은 미국이 주장한 것으로 그 기간도 최장 10년(30년)에 이르는 것이었고, 오히려 소련은 빠른 기간 내에 조선을 독립 국가로 만들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우익 계열이면서 친미성향의 동아일보는 미국의 편에 서서 의도적으로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반대한 것으로 왜곡 보도했고 미 군정은 모스크바의 결정 내용에 대해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동아일보의 왜곡 보도를 사실상 묵인했다.

결국, 동아일보 거짓 보도는 우익세력의 반탁운동과 반소감정을 확산시켜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대립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통치 주체는 임시정부라거나,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민주주의 발전과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 임시정부와 협의해 최고 5년을 기한으로 4개국이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 등, 통일 독립국 건설을 보장한다는 합의 내용은 보도하지 않고 우리 국민에게 새로운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처럼 왜곡 보도하여 혼란을 선동했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당시 논란이 되었던 신탁통치안은 미·소 공동위원회와 조선 임시정부 사이에 협의를 거쳐 실시하게 되어 있었다.

임시정부가 신탁통치를 강력히 반대한다면 실시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또한, 4대 국에 의한 신탁통치임을 감안 할 때 남북분단의 소지를 없앨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합리성은 무시되고 오로지 찬반의 대립 속에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진지한 고민은 사라지고 말았다.

더욱더 문제가 된 것은 반탁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의 진정성이었다.

반탁운동에 앞장선 우익세력에는 다수의 친일세력이 포진되어 있었다.

그들은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신들을 민족 세력으로 둔갑시켰다. ‘반일이냐 친일이냐’로 갈리던 경계가 ‘반탁이냐 찬탁이냐’로 바뀌면서 반탁운동을 주도한 친일파들이 애국 민족 세력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에 김구는 “한국은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신탁통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신탁통치 반대 운동은 제2의 독립운동이다”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이 발표는 임시정부가 과도정부의 역할을 하겠다는 김구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포고령 이후 경찰들이 김구의 지휘를 받겠다며 김구를 지지하고 나섰고, 공산주의자들과 미 군정청에서 근무하는 한인들까지 동조하고 나서자 미 군정청 하지 장군은 강하게 반발하며 김구를 적대했다.

남북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 신문기사/전시실 [정성환 기자]
남북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 신문기사/전시실 [정성환 기자]

 

◆ 남북분단의 시발점 이승만의 정읍 발언

1946년 3월 20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되었으나 미·소간 대립으로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 순회연설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하겠다”라는 발언을 하며 단독 정부수립 의지를 강력히 피력했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단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1947년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렸으나 미·소 양국의 극심한 대립으로 최종결렬되고 만다.

이에 중도 우파 김규식과 중도 좌파 여운형 등은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 합작 위원회를 결성하고, 친일파 처리와 토지개혁 등을 실현해 이승만에 맞서 주도권을 잡으려 했으나 1947년 좌·우 합작운동을 이끌던 여운형이 극우파에 의해 암살됨으로써 한반도의 남·북 분단은 현실로 다가왔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회의에 따라 만들어진 미·소 공동위원회는 한반도에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신탁통치방식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였으나 임시정부에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를 놓고 미국과 소련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회의는 성과 없이 결렬되었고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해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면밀하게 분석했다고 한다.

미국 참모본부는 군사안보 측면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다고 분석했으며, 미국은 한반도에서 신속하게 철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판단은 한국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국제정세에 편승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한국문제는 UN으로 이관되어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서 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결정은 소련과 북한의 강한 반발을 가져왔다.

북한과 남한의 인구비율이 2:1로 남한이 훨씬 많았기에 선거를 하면 북한은 무조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이승만과 친미군정의 한민당은 환호성을 질렀고, 김구는 미소 양군 철수와 남북요인회담을 통한 통일 정부수립을 주장했다.

김구는 평생을 독립투쟁에 헌신한 민족주의자였다. 김구로서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민족분단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구는 뒤늦게 후회했다. 차라리 반탁이 아닌 찬탁운동을 할 것을…

반탁투쟁으로 미 군정과 대립했던 김구는 1946년 초부터 지방 순회를 시작하면서 충남 예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생가를 찾아가게 된다.

김구는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를 잊은 적이 없었다.

윤봉길의 14주기 추도식을 마친 후 김구는 윤봉길과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 봉환을 추진한다. 3 의사 유해가 부산에 도착하고 김구는 추모사를 하던 중 엎드려 통곡한다.

“세 사람을 보내고 나만이 살아 있으면서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3 열사에 대하여 부끄럽기 할양 없고 회한을 금할 수 없다.” 「백범일지 」中-

김구는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어려움을 헤아리며 어디에서나 통일을 강조했지만, 분단은 서서히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1947년(72세) 김구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 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 정부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김구는 후회했다. 왜 내가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을 했을까.

한편, 이번 백범 김구 이야기는 총 9편으로 △1편 광주 백범기념관 △2편 독립운동의 시작 '치하포 사건'과 보성 은거가 △3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4편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5편 김구의 한인 애국단 △6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과 대한광복군 창설 △7편 광복과 김구의 환국 △8편 미국과 소련에 의한 민족의 분열 △9편 남·북분단과 겨레의 큰 별 지다 순으로 매주 월요일 연재되고 있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