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이야기⑥] 임시정부의 이동과 남목청 사건(김구암살미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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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이야기⑥] 임시정부의 이동과 남목청 사건(김구암살미수사건)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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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만 3천 리(6000Km) 20여 년에 걸친 고난의 피난길
상해(1919)→항저우(1932)→전장(1935)→창사(1937)→광저우(1938)→류저우(1938)→치장(1939)→충칭(1940)으로 이동
남목청 사건, 일본군과 내통한 밀정 이운환을 사주해 김구,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 등을 향해 권총을 난사한 사건(김구암살미수사건)
독립운동지도자 숨지고 임시정부의 힘은 약화 되고 분열돼...항일독립투쟁 전선에 먹구름도...
백범 김구(1876~1949)
백범 김구(1876~1949).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 51] 정성환 전문기자 = 이번 이야기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외치고, 평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완전한 통일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중 「제6편 임시정부의 이동과 남목청 사건」이다. 

 

광주 백범기념관/전시실./정성환 기자
광주 백범기념관/전시실. [정성환 기자]
임시정부 이동 경로/전시실. 상해(1919.4)→항저우(1932.5)→전장(1935.11)→창사(1937.11)→광저우(1938.7)→류저우(1938.10)→치장(1939.4)→충칭(1940.9)./정성환 기자
임시정부 이동 경로/전시실. 상해(1919.4)→항저우(1932.5)→전장(1935.11)→창사(1937.11)→광저우(1938.7)→류저우(1938.10)→치장(1939.4)→충칭(1940.9). [정성환 기자]
광주 백범기념관/전시실 [정성환 기자]
광주 백범기념관/전시실 [정성환 기자]
광주 백범기념관/전시실 [정성환 기자]
광주 백범기념관/전시실 [정성환 기자]

 

◆ 임시정부 1만 3천 리(6000Km) 고난의 피난길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로 인해 광분한 일본군에 의해 사건과 관련이 없는 한인들이 마구잡이로 붙잡혀 끌려가자, 김구는 외신을 통해 윤봉길과 이봉창 의거의 진상, 한인 애국단의 실체, 그리고 이 모든 걸 자신이 주도했음을 당당히 밝힌다.

60만 위안의 현상금(약 200억 원)을 내건 김구의 수배 전단이 상하이의 모든 거리에 나붙기 시작하고, 일제의 수사망은 점점 김구를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김구는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임시정부 요원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상하이를 떠나야만 했다.

1932년 5월 상하이를 벗어나 탈출에 성공한 김구는 항저우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자싱’에 은거하며 1940년 충칭(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중국 각지 1만 3천 리 길을 이동하며 생사를 오가는 8년간의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자싱은 상하이와 항저우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당시 일제는 이곳을 지나는 모든 기차를 검문 검색하며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김구는 저보성(추푸청, 상하이 법대 총장)이 마련해준 은신처에 머물러 임시정부의 활로를 모색했고, 그가 머무는 곳이 곧 임시정부였기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도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현상금 포스터가 ‘자싱’에 나붙기 시작하자 김구는 또다시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야만 했다.

그는 자싱에 도착할 때부터 자신의 피신 생활을 도와주던 여자 뱃사공 ‘주애보’의 배를 타고 다니며 5년간의 기나긴 선상생활을 이어가며 임시정부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나간다.

 

9년 만에 만난 가족(1934)/전시실 [정성환 기자]
9년 만에 만난 가족(1934)/전시실
(왼쪽부터 아들 인, 어머니 곽낙원, 김구, 아들 신) [정성환 기자]
북망자운(北望慈雲)/김구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휘호/전시실 [정성환 기자]
북망자운(北望慈雲)/김구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휘호/전시실 [정성환 기자]

 

◆ 어머니 곽낙원 여사

1934년 둘째가 13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두 손자를 데리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은신하던 중국 ‘자싱’으로 찾아온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김구가 21살에 일본군 ‘쓰치다’를 처단하고 인천 감리서에 투옥되었을 때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라로 할 만큼 애국심이 대단했으며, 105인 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삯바느질과 부잣집 가정부로 일하면서 옥바라지를 해가며 아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 든든한 후원자였다.

1937년 중국의 수도 난징 근처 전장에 은거할 때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청년단과 동지들이 생일상을 차려주려 하자 “생일상을 차릴 돈을 나에게 달라. 그러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겠다”라고 하며 오히려 돈을 더 보태 독립운동에 쓰라며 권총을 사서 청년단에게 건네줄 정도로 아들 못지않은 애국심을 지닌 분이었다.

윤봉길 의거로 상해를 떠나 피신하는 몸이라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어머니를 편히 모시지 못한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서운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들이 잘못한 일을 하면, 독립군의 정신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환갑이 될 무렵까지 종아리를 때릴 정도로 현명하고 합리적인 성품을 지닌 강단 있는 어머니였다.

아내가 죽은 이후에는 돌이 갓 지난 손주에게 빈 젖을 물리며 두 손자(인, 신)를 키우면서도 흔들림 없이 강인했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임시정부와 함께 자싱·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 등지를 옮겨 다니며 임시정부의 어머니로서 온갖 궂은일을 헤쳐나가는 여성독립운동가였으며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러나 김구는 어머니와 함께 오래 지낼 수가 없었다.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했던 어머니가 1940년 만리타국 충칭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82세에 생을 마치게 된 것이다.

 

◆ 김구와 장제스의 만남

도피 생활 1년째가 되던 1933년 김구는 윤봉길 의사의 쾌거에 감화한 중국의 최고지도자 장제스를 난징에서 만나게 된다.

1932년 1월 일제가 상하이를 침략했을 때 장제스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지만, 일제의 파상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상하기는 일제에 점령당한다.

이러한 시기에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는 중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이에 감화된 국민당 주석 장제스가 김구를 난징으로 초대한 것이다.

김구는 장제스를 만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고, 장제스는 뤄양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임시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한다.

김구와 장제스의 만남, 이 만남으로 인해 임시정부는 중국에서의 입지를 강화했고,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표하는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김구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상하이를 떠나 힘든 도피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임시정부 외각 좌·우파 정당들이 속속 창당된다.

그들은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하며 1935년 난징에서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김원봉의 의열단 등이 통합해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하게 된다.

그러나 김원봉이 이끄는 사회주의 계열의 의열단이 조선민족혁명당의 당권을 장악하자, 이에 불만을 느낀 조소앙과 지청천이 조선민족혁명당을 이탈하면서 민족대표정당으로써의 기능을 대부분 상실하게 된다.

1935년 김구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에 대항하기 위해 순수한 민족주의 정당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해 임시정부를 재정비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이탈한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연합해 연립내각을 구성한다.

그리고 장제스의 중개로 김원봉과 제휴를 시도하지만, 사회주의 계열의 김원봉과의 사상적인 괴리가 심해 실패하고 만다.

이후 김원봉은 1938년 ‘우한’에서 최초의 한인 무장 단체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중국 국민당과 연합해 항일전쟁을 펼치다 1942년 임시정부 광복군에 편입된다.

1932년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가 1935년까지 항저우에 머물다 난징에 정착한 1937년(62세)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수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누가 먼저 더 많이 목을 치느냐’라고 서로 경쟁하면서 무고한 민간인 30만여 명을 잔혹하게 죽이는 ‘난징대학살’을 자행한다.

위기에 몰린 장제스는 충칭으로 피난을 떠나고,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 또한 전쟁을 피해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창사’로 이동한다.

“잠결에 갑자기 공중에서 기관포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나서는데 벼락 치는 소리가 나면서 천장이 무너져 버렸다. 만약 그때 나가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천장에 깔려 죽었을 것이다.” 「백범일지」 中-

난징에서 창사로 가는 장강 2,000리 길을 100여 명의 임시정부 식구들은 목선에 의존해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역풍을 만나면 사람들이 직접 배를 끌고 가야만 하는 고난의 뱃길은 임시정부의 운명처럼 위태로웠다.

이처럼 위험을 감수하고 김구와 임시정부 요원들이 창사로 가야만 했던 것은 중국의 곡창지대인 창사는 식량값이 매우 저렴해 임시정부 식구들의 식량난을 다소 해결할 수 있다는 점과 창사 가까이에 있는 홍콩을 통해 해외와 통신 연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창사 활동구지/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터[사진 출처, 네이버]
창사 활동구지/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터[사진 출처, 네이버]
조선혁명당 본부 회의실(남목청 6호) [정성환 기자]
조선혁명당 본부 회의실(남목청 6호)
김구 등 독립운동지도자가 조선혁명당원 이운환의 총격을 받은 장소[사진 출처=네이버]
가슴에 총탄을 맞고 의연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김구의 모습 [출처=네이버]
가슴에 총탄을 맞고 의연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김구의 모습 [출처=네이버]

 

◆ 남목청 사건 (김구암살미수사건)

1932년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1935년까지 항저우에 머물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다시 피난길에 올라 1937년(62세) 12월 마침내 창사에 도착한다.

이 무렵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조소앙의 한국독립당은 재정 여건이 열악해 김구의 지원이 필요했고, 김구 역시 이들 단체와의 연합을 통해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응집시키고자 했다.

1938년 한국국민당의 김구는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조소앙의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협의하기 위해 조선혁명당 당사가 있는 ‘남목청’에서 지청천과 유동열, 조선혁명군을 주도하던 현익철 등이 모여 통합을 논의하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김구암살미수사건’으로 불리는 ‘남목청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통합논의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낀 조선혁명당의 강창제, 박창세 등이 합당을 반대하며 일본군과 내통한 밀정 조선혁명당원 이운환을 사주해 김구,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 등을 향해 권총을 난사한 사건이다.

이 총격으로 만주지역 독립군 세력의 중심이었던 현익철 선생이 사망하고 김구·유동열·지청천은 중상을 입었다.

심장에 총을 맞은 김구는 사색이 짙어 곧바로 상아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고 의사들은 응급치료마저 포기하게 된다.

이처럼 생명이 위중할 만큼 치명상을 입은 김구는 병원에 실려 온 후 4시간 동안이나 삶과 죽음을 오가며 강인한 정신력으로 살고자 몸부림쳤고, 의사들의 헌신적인 치료와 중국 국민당 총재 장제스의 친서와 치료비 등 각별한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후 김구는 왼쪽 심장 아래에 박힌 총탄으로 인해 수전증을 앓았고, 글씨를 쓸 때 손 떨림이 심해 똑바로 글씨를 쓸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김구의 글씨를 ‘역사적 의미가 깊은 글씨체’라 하여 떨림체·총알체로 불리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의 승전이 곧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믿었고, 항일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이 절실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3당 통합회의가 어렵게 열렸지만, 민족분열과 동족상잔의 비극인 ‘남목청 사건’으로 인해 독립운동지도자가 숨지고 3당 통합논의가 중지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힘은 약화 되고 분열되어 항일독립투쟁 전선에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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