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이야기⑤] 김구의 한인애국단...이봉창·윤봉길 "독립운동 강인함 전세계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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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이야기⑤] 김구의 한인애국단...이봉창·윤봉길 "독립운동 강인함 전세계 알려"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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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임시정부 위기 극복 ‘한인애국단’ 조직...“한 사람을 죽여 만 사람을 살린다" 기치
이봉창, 일본 천황 향해 폭탄 던져..."한국 독립운동 강인함 전 세계 알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재함 과시"
윤봉길, 홍커우공원서 폭탄 투척 일본군 총사령관 등 사망..."우리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는 신념과 용기 심어"
김구의 한인애국단, 독립투쟁의 구심점..."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량을 결집하는 요인으로 작용"
우리나라의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지고 싶었던 백범 김구/전시실. /정성환 기자
우리나라의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지고 싶었던 백범 김구/전시실.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50] 정성환 전문기자 = 이번 이야기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외치고, 평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완전한 통일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중 「제5편 김구의 한인애국단」이다. 

 

백범 김구(1876~1949). /정성환 기자
백범 김구(1876~1949). /정성환 기자
김구 선생 휘호/광주 백범기념관 야외전시실. /정성환 기자
김구 선생 휘호/광주 백범기념관 야외전시실. /정성환 기자

 

◆ 백범(白凡) 김구의 ‘한인애국단’

임시정부 수립 초기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이동휘의 무장투쟁론,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의 대립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분열의 불씨로 남아있었다.

이런 와중에 1921년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와 정보수집 통신기관인 교통국이 일제에 의해 발각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과 독립자금 관리문제, 외교 독립운동의 실패로 임시정부는 대혼란을 겪게 된다.

이에 신채호 등은 임시정부의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개편을 단행하기 위해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열었지만, 안창호 등의 ‘개조파’와 신채호 등의 ‘창조파’, 김구의 ‘현상유지파’가 서로 분열·대립하면서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었고 ‘창조파’의 독립운동가들은 상해를 떠난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실패 이후 임시정부는 초창기의 대표성을 상실한 채 오랜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극도의 혼란과 분열에 휩싸이게 된다.

1925년 3월 임시정부 의정원은 임시정부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위임통치 청원 사건과 대통령으로서의 실정의 책임을 물어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개혁을 단행한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은식은 헌법을 개정해 임시정부의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개편해 서로군정서 총재였던 이상룡을 국무령에 선출하고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분열된 임시정부를 재건하기란 쉽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침체기에 접어든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이라는 친일정권을 수립하자,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고, 임시정부 또한 중국과는 우호적이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김구는 이러한 중국인의 반일 감정을 활용해 중국과 우호 관계를 증진 시키고, 침체 된 임시정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게 된다.

‘한인애국단’은 “한 사람을 죽여서 만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혁명수단의 근본이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일제의 주요인물들을 암살하고 주요건물을 폭파해 독립을 이루고자 결성된 비밀결사 조직으로 그 중심에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가 있었다.

 

이봉창 의사(1901~1932). /정성환 기자
이봉창 의사(1901~1932). /정성환 기자
이봉창 의사 한인애국단 입단 선언문/전시관. /정성환 기자
이봉창 의사 한인애국단 입단 선언문/전시관. /정성환 기자
재판정에 들어서는 이봉창 의사/전시실. /정성환 기자
재판정에 들어서는 이봉창 의사/전시실. /정성환 기자

 

◆ 일본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

이봉창(1900~1932)은 1900년 8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봉창의 집안은 원래 수원에서 농사를 지었으나 일제가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농지를 강제로 탈취하자 서울로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10살 되던 해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봉창은 가세가 기울자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 약국 점원 등을 전전하다 철도기관사의 꿈을 키우기 위해 용산역 고용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이봉창은 ‘조센징’이라는 굴욕적인 놀림을 당하고 일본인과의 차별대우로 인한 감정이 폭발하자 차라리 일본인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마음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에 도착한 이봉창은 일본인이 되기 위해 일본어를 배우며 막노동일을 전전하며 살아가지만, 유창한 일본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임금이나 승진 등 불이익을 당하고 해고되기를 반복했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윤봉길은 멋을 알고 풍류를 즐기는 신세대 멋쟁이로 살아가지만, 그에게 그의 삶이 뒤바뀐 계기가 찾아온다.

일왕 즉위식 구경을 갖다가 조선인이란 이유로 9일이나 구금을 당해도 호소할 곳이 없었던 이봉창은 내가 일본인으로 살고 싶어도 일본사람들은 나를 일본인으로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봉창은 조선인들이 받는 차별을 손수 경험하면서 이 모든 것이 나라를 빼앗긴 탓임을 깨닫게 되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봉창은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독립운동의 본거지인 상하이로 향한다.

1931년 상해에서 백범을 만난 이봉창은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죽이지 못합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저는 31년 동안 거의 맛보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영원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고자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에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을 완수할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일왕을 처단하겠소”라며 김구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김구는 이봉창의 굳은 의지를 믿었다.

1931년 12월 이봉창은 동경으로 건너가 일왕 히로히토를 처단할 것을 결심하고 안공근(안중근 의사 동생)의 집에서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입단한 후 스스로 작성한 선서문을 목에 걸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호방하게 웃으며 김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내 얼굴에 슬픈 기색이 있었던지 이씨가 오히려 나를 위로하였다.

저는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니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이에 억지로 미소를 띠고서 사진을 찍었다.”-「백범일지」中-

김구는 동경으로 떠나는 이봉창에게 수류탄 두 개와 거사 자금 300원을 호주머니에 넣어준다. 이봉창은 막중한 임무를 가슴에 안고 일본으로 향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일본 황궁 출입문과 국회 법무성, 경시청으로 둘러싸인 도쿄의 심장부에서 일제 괴뢰 정부인 만주국의 푸이와 함께 관병식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가던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탄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폭발력이 약해 명중시키지 못하고 이봉창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만다.

이 사건은 일제 식민국가 중 유일하게 조선 청년이 일본 천황 히로히토 암살하려는 사건으로 폭탄이 불발되어 천황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한국 독립운동의 강인함을 전 세계에 알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재함을 과시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봉창 의거는 중국 내에서 일제가 꾸민 ‘만보산 사건’으로 야기된 한·중 양국 간의 감정 대립을 극복하고 우호 관계를 증진 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기관지 <국민일보>는 이봉창의 동경 의거를 ‘세계에서 제일 위대하게 사람들을 놀라게 한 소리’라는 표현으로 이봉창을 “천하제일의 지사”로 치켜세우고,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실패했다’라고 대서특필했다.

이처럼 이봉창 의거 실패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 ‘국민일보’ 기사 내용은 중·일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 됐고, 일제는 이러한 신문기사 내용을 트집 잡아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인 대륙침략에 나섰으며, 상해임시정부 또한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게 된다.

“이봉창 동경 의거가 세계에 알려지자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 재외동포들은 크게 흥분하였다. 나를 격려하는 편지가 눈송이처럼 태평양을 건너 날아들었다.” -「백범일지」中-

이봉창은 비밀 재판을 통해 일본 도쿄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0월 10일 일본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32세 미혼의 젊은 나이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1946년 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찾아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했으며, 정부는 이봉창 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조국독립을 위해 초계처럼 목숨을 버린 이봉창, 역사는 그를 꺼져가는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린 위대한 독립투사로 기록했고, 그의 살신성인의 정신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이어진다.

 

윤봉길 의사(1908~1932)/홍커우공원 의거 3일 전 한인애국단 선서식. /정성환 기자
윤봉길 의사(1908~1932)/홍커우공원 의거 3일 전 한인애국단 선서식. 가슴엔 선언문을, 왼손엔 권총을, 오른손엔 폭탄을 들고 있다. [출처=네이버]
홍커우공원 의거 현장/전시실. /정성환 기자
홍커우공원 의거 현장/전시실. /정성환 기자
윤봉길 의사 체포 모습/전시실. /정성환 기자
윤봉길 의사 체포 모습/전시실. /정성환 기자
윤봉길 의사 순국/전시실. /정성환 기자
윤봉길 의사 순국/전시실. /정성환 기자
윤봉길 의사 유언/함평 김철 기념관 전시실 소재. /정성환 기자
윤봉길 의사 유언/함평 김철 기념관 전시실 소재. /정성환 기자

 

◆ 홍커우공원 의거 윤봉길 의사

1932년 일본의 심장 동경 한복판에서 일본 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이봉창 의거 이후 윤봉길은 김구를 찾아온다.

윤봉길(1908~1932)은 고려 시대 명장 윤관의 후손으로 충남 예산 출신이다.

그는 고향에서 독서회 등을 조직하고 야학 교재로 <농민독본>을 저술하는 등 문맹 퇴치와 농촌계몽 운동에 헌신하고, 월진회(月進會)와 ‘수암체육회’를 조직해 농촌진흥에 헌신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1930년 3월 23세인 윤봉길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로서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이라는 비장의 글을 남긴 채 소중한 가족을 뒤로하고 만주로 향했다.

만주에 도착한 윤봉길은 세탁소 일을 하면서 독립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931년 상해로 건너온 윤봉길은 공장 직공으로 일하며 독립활동을 모색하던 중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칠 각오임을 밝힌다.

이처럼 윤봉길의 의지는 굳고 깊었다. 김구는 그의 의로움과 대범함을 한눈에 알아본다.

“윤 군은 말했다. 제가 날마다 채소 바구니를 등에 메고 홍커우 쪽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상해로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동경 사건과 같은 계획이 또 있을 줄 믿습니다. 저를 지도하여 주시면 죽어도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백범일지」中-

당시 상하이는 ‘한인애국단’ 단원이었던 이봉창 의사가 일본 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사건을 두고 중국 언론의 ‘안타깝게 실패했다’라는 보도는 일제를 자극했고, 이에 반발한 일제는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성공한다.

이 무렵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해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며 독립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한다.

그리고 그에게 예상외로 기회가 빨리 찾아온다. 일제가 홍커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 기념과 상하이 전승 축하 행사를 홍커우공원에서 열기로 한 것이다.

윤봉길은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을 처단할 것을 결심하고 김구를 찾아가 폭탄을 구해달라고 부탁한 후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거사를 며칠 앞두고 최후를 준비하던 중 두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라. 태극의 깃발을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 -

1932년 4월 29일 거사가 있던 아침, 김구는 도시락형 폭탄과 물통형 폭탄 두 개를 윤봉길에게 전한다.

동지를 사지로 보내며 가슴이 찢어지는 백범과는 달리 윤봉길은 직장에 출근하는 것처럼 태연했다고 한다.

“선생님, 이 시계는 제가 어제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시계를 바꾸시지요,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라며 윤봉길은 자신의 시계를 김구에게 건넨다.

목이 멘 목소리로 “훗날 지하에서 만납시다”라는 마지막 인사를 나눈 김구는 윤봉길과 바꾼 이 시계를 생명이 다한 그 날까지 평생 차고 있었다고 한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한복판 홍커우공원에 시라카와 총사령관, 우에다 육군 중장, 노무라 해군 중장, 시게미쓰 주중 공사 등 일본 수뇌부와 상하이 거주 일본인 1만여 명이 일왕 생일과 상하이 전승 기념행사에 참여한 가운데, 일본 군인 1만여 명이 관병식을 치르기 위해 광장에 도열 해 있었고, 윤봉길은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이 벌이는 엄청난 규모의 무력시위 한복판에서 사전답사 때 점찍어둔 곳에 자리를 잡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드디어 성대한 기념행사가 시작되고 일본군과 수뇌부가 기미가요(일본국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드디어 윤봉길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윤봉길은 기미가요가 울려 퍼질 때 폭탄을 던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윤봉길은 눈 깜작할 사이 자살용 도시락 폭탄을 땅에 내려놓은 다음,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단상 앞으로 돌진해 물병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단상에 정확히 명중했고, 폭탄이 터진 단상은 깊이 파였으며 기념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상하이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다’ 등이 사망하고, 주중 공사 ‘시게미쓰’와 상해를 침공한 우에다 육군 중장, 노무라 해군 중장 등 일본군 주요 수뇌부가 다리가 절단되고 눈에 파편이 박히는 등 치명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소재. [출처=네이버]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소재. [출처=네이버]

 

임무를 완수한 윤봉길은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았고, 현장에서 당당하게 체포되어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윤봉길은 일본으로 호송되어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서 1932년 12월 19일 총살형에 의해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다.

1946년 김구는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찾아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했으며, 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윤봉길 의사의 쾌거는 한국동포와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특히 중국 국민당 총통이던 장제스는 “30만 중국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극찬했으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침체의 늪에 빠진 임시정부를 다시 일으켜 우리 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는 신념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한국인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20년대 내내 중국 정부로부터 멸시와 푸대접을 받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중국 장제스 국민당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38년 ‘김원봉’이 중국 한커우(우한)에 우리 민족으로 구성된 독자적인 독립군 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중국 본토에서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게 된다.

또한, 한국의 독립군들은 중국 군관학교에서 입학해 고급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이때 훈련을 받은 유능한 독립군들은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에 귀중한 밑거름이 된다.

이처럼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목숨 바친 애국충절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을 향한 희망을 잃지 않았고, 대한독립군의 존재를 잊지 않았다.

이처럼 김구가 이끈 ‘한인애국단’의 활약은 독립투쟁을 이끈 구심점이었으며,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독립운동단체에 깊은 감명을 주어 임시정부의 역량을 결집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편 이번 백범 김구 이야기는 총 9편으로 △1편 광주 백범기념관 △2편 독립운동의 시작 '치하포 사건'과 보성 은거가 △3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4편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5편 김구의 한인 애국단 △6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과 대한광복군 창설 △7편 광복과 김구의 환국 △8편 미국과 소련에 의한 민족의 분열 △9편 남·북분단과 겨레의 큰 별 지다 순으로 매주 월요일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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