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이야기④]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상태바
[백범 김구 이야기④]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2.1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19년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 선출...‘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925년 임시의정원 이승만 탄핵...대한민국 최초 탄핵 대통령 기록
1925년 박은식 2대 대통령 선출...다양한 파벌로 임시정부 위기 봉착
김구의 헌신, 대한민국임시정부 명맥...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구심점 부상
김구 「백범일지」 집필...상권은 두 아들에게, 하권은 국민에게 남겨...보물 제1245호
「백범일지」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고, 임시정부를 굳건히 지키는 원동력 '평가'
백범 김구(1876~1949). /정성환 기자
백범 김구(1876~1949).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49] 정성환 전문기자 = 이번 이야기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외치고, 평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완전한 통일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중 「제4편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이다.

광주 백범기념관/광주광역시 학동 소재. /정성환 기자
광주 백범기념관/광주광역시 학동 소재. /정성환 기자

 

◆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

이승만(1875~1965)은 1898년 만민공동회를 통해 청년 지도자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개화파 박영효 세력이 꾸민 고종황제 폐위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으나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04년 특별사면으로 출옥해 미국으로 건너가 1907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스티븐슨을 암살한 전명운과 장인환의 재판에 통역요청을 받았으나, 미국 내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부했다.

1910년 귀국해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다 ‘105인 사건’에 연루되자 일제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외교독립노선을 걸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연맹 창설이 대두된 시점인 1919년 2월 외교독립론자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보냈지만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윌슨에게 보낸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는 훗날 그가 대통령직에서 면직되는 주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무렵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해외 독립운동가 조소앙·박은식 등 39명이 모여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동경에서는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하면서 대한독립의 염원을 세계에 선포한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위한 조직적인 단체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1919년 4월 연해주·상하이·서울에 임시정부를 수립해 이승만(1875~1965)을 연해주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에 임명한다.

그러나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상해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으나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단재 신채호는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라고 비판하며 임시정부와 의정원의 해산을 요구하는 등 이승만과의 갈등이 깊어졌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에 집정관 총재사무소를 설치하고 대미외교 업무를 수행하면서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임에도 불구하고 우편엽서 등 홍보물과 각종 공문의 서명란에 임시정부 헌법에도 없는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하며 대통령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이에 격분한 도산 안창호는 “상해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대통령 직함을 사용하면 헌법위반이니 대통령 직함을 사용하지 마시오”라고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내가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으니 지금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퍼지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될 것이니 그것은 당신들 책임이오”라고 반발하며 하와이에서 자신이 대통령이라는 것을 자인하며 대통령 취임 행사를 거행하는 등 자신의 정치 구상을 일방적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창호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원들은 위임통치 청원 사건과 대통령 직책을 불법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이승만과 갈등을 겪었지만,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합된 임시정부수립을 위해, 대통령에 외교독립론자인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무장투쟁론자인 이동휘를 선출해 1919년 9월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떠나 미국에 머물면서 임시정부의 적법한 절차 없이 독자적으로 구미위원부를 조직해 독립운동 자금을 직접 관리하며 재정권을 확보하는 데 집착했다.

당시 독립자금 모금 운동은 독립 후 상환해준다는 공채를 발행했는데, 우리 동포들은 나라도 없는 어려운 여건 속에 머나먼 타국에서 힘든 생활을 보내지만 오로지 애국심 하나로 공채를 사서 독립자금을 마련해 줬다고 한다.

그런데 이승만은 교포들로부터 거둬들인 독립운동자금 대부분을 거의 독점하면서 임시정부의 승인도 없이 임의대로 사용해 임시정부와 대립했다.

임시정부의 요원들은 권력과 재정권이 임시정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승만은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승만은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정된 모든 사항을 부정하고, 비폭력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며 임시정부의 항일투쟁 방침에는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이승만의 행동과 발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열과 위기를 초래했다.

“이승만 탄핵” 독립신문 호외. 1925년 3월 23일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사실을 알린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호외가 최초로 확인됐다. 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미발굴 사료다. [장자크 홍 푸안 씨 소장자료/출처=네이버]
“이승만 탄핵” 독립신문 호외. 1925년 3월 23일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사실을 알린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호외가 최초로 확인됐다. 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미발굴 사료다. [장자크 홍 푸안 씨 소장자료/출처=네이버]

 

1920년대 상해 임시정부에는 다양한 파벌들이 모여 있었다.

먼저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무장세력인 이동휘·박용만, 그리고 미국 LA에서 흥사단을 조직해 실력양성을 주장한 도산 안창호, 외교독립론을 신봉했던 이승만 등 다양한 독립운동 노선을 두고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목숨 걸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1921년 임시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국무총리 이동휘는 위임통치 청원 문제, 대통령 직함 임의 사용문제, 구미위원부의 독립자금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한 점, 대통령으로서 주된 근무지인 상하이를 오랜 시간 떠나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 등을 문제 삼으며 이승만을 비판하고 나서자 그는 강력히 항의하며 변명하는 데 급급했다.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19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한국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과 5년 동안 근무지 이탈, ‘구미위원부’ 독립자금 유용, 임시정부의 헌법 부인 등의 사유로 “임시대통령의 위법 또는 범죄행위가 있는 경우 총원 5분의 4 이상의 출석, 출석 원 4분의 3 이상의 가결로 탄핵 또는 심판할 수 있다”라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에 따라 1925년 임시의정원의 탄핵을 받아 대통령직에서 면직되고,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됐다.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면직된 이후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거부했으며, 1928년까지 구미위원부를 그대로 유지한 체 동포들로부터 독립자금과 각종 성금을 거둬들였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방에서는 1920년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 등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성과는 초라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연이어 대패한 일본군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약 2만여 명의 군대를 투입해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던 한인촌을 불사르고 무고한 한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간도참변(경신참변)이 발생해도 독립운동의 중앙기관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부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임시정부와 전투지역이 각각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현장 중심의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기가 쉽지 않아 지휘체계의 통일성이 부족했고, 만주와 상해간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통신수단도 원활하지 않아 신속한 보고체계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상해임시정부의 지도력이 약화 되는 동안,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임시정부의 테두리를 벗어나 삼부(정의부·신민부·참의부)를 조직하고 독자적인 자치행정과 무장독립군을 편성해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이런 와중에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 참석한 비폭력 외교독립론자 이승만 대통령이 임시정부 내 무장투쟁세력들을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자 임시정부 요인들의 비판이 이어졌다.

결국, 1921년 이동휘와 안창호가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를 떠나 만주나 연해주로 향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상해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독립 노선의 실패와 조선 위임통치 청원 사건, 독립운동 자금 유용사건은 임시정부의 분열을 가져왔다.

또한, 무장투쟁파였던 국무총리 이동휘가 소련의 레닌이 조선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낸 160만 루블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자기 파벌을 위해 사용해버린 사건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무정부 상태로 몰고 갔으며, 설상가상 국내 비밀행정조직인 연통제와 비밀 연락망인 교통국이 일제에 발각되면서 임시정부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1923년 임시정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안창호를 중심으로 국민대표 회의를 소집해 임시정부 개혁을 논의하지만,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신채호 중심의 ‘창조파’와 점진적 개혁을 주장한 안창호 중심의 ‘개조파’가 대립하면서 국민대표 회의는 실패로 끝나고, 이에 실망한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연해주·미주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국민대표 회의가 무산되자 위기에 몰린 임시정부는 1925년 ‘개조파’를 중심으로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개혁을 단행한다.

박은식은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을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개편해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지만, 임시정부는 무기력한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다.

1926년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헌법을 개정해 임시정부를 집단지도체제로 개편하고 국무령 직을 사임한다.

김구는 위기에 몰린 임시정부를 구하기 위해 1930년 안창호와 함께 한국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조소앙의 삼균주의(정치·경제·교육 균등)를 임시정부의 이념으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김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임시정부의 침체기를 벗어나기 위해 1931년 결성된 ‘한인애국단’의 활약으로 김구는 임시정부의 암흑기에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구심점으로 부상하게 된다.

 

상하이에서 찍은 가족사진/왼쪽부터 김구, 아들 인, 부인 최준례/전시실. /정성환 기자
상하이에서 찍은 가족사진/왼쪽부터 김구, 아들 인, 부인 최준례/전시실. /정성환 기자

 

김구가 거주했던 상하이 골목 최준례 무덤/왼쪽부터 신·김구·곽낙원·인/전시실. /정성환 기자
김구가 거주했던 상하이 골목(왼쪽). 최준례 무덤(오른쪽)/전시실. /정성환 기자

 

◆ 김구의 아픔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의 극심한 대립으로 타협을 이루지 못하자, 당시 임시정부 내무총장이었던 김구는 ‘국민대표’ 회의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임시정부는 그 대표성을 상실한 체 오랜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김구는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를 홀로 지키며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동안 그에게도 큰 슬픔이 찾아온다. 김구가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한 이후, 1922년 어머니와 부인, 큰아들과 함께 상하이에서 다시 만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던 중 아내가 둘째 아들 ‘신’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치료를 받던 중 폐렴까지 겹쳐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김구는 부인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병원이 있는 곳은 일본군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에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김구는 아내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보내야만 했다.

 

백범일지와 휘호(복제본)/백범김구기념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 백범일지

「백범일지」는 김구가 두 아들과 국민에게 남긴 유서다. 발간 50주년인 1997년 보물 제1245로 지정되었다. 「백범일지」는 현재 일본어·중국어·영어·독일어·몽골어로 번역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읽히고 있다.

한 권의 책이지만 상권과 하권으로 구분한다. 상권은 중국 상하이에서 아들 인과 신에게, 하권은 충칭에서 국민에게 유서로 남긴 것이다.

「백범일지」 상권을 쓸 때인 1928년은 임시정부의 운영이 가장 어려울 때였다.

독립운동 자금과 인력을 보급해주던 국내와의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 의해 일망타진 되어 월세도 내지 못할 정도였고,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과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많은 독립운동 주요 인사가 임시정부를 떠나 정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언제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에 김구는 자식들에게 아비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김구는 국내에서 할머니 손에 자라고 있는 김인·김신 두 아들에게 유서를 쓰듯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게 된다.

이때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재외동포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수취인 불명으로 편지가 되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지만, 김구의 도움 요청에 독립자금을 보내준 동포들이 점차 늘어났다. 동포들의 지원금은 경제난과 인력난 등 온갖 어려움으로 사투를 벌이던 김구에게 천군만마와 같았다.

하권은 충칭에서 집필한 것으로 김구의 독립투쟁사를 회고한 기록이다.

이때에는 중국과 일본 간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해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구는 목숨이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 그동안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실상과 경륜을 국민에게 알리고 싶었다.

김구는 충칭 임시정부 시기인 1942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다음 해에 「백범일지」 하권을 집필한다.

「백범일지」는 필사되어 일본 미국 등 재외동포들에게 보내져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렸으며, 동포들의 후원과 격려와 사랑을 받아 임시정부를 굳건히 지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야말로 해지는 외딴섬에 슬픈 깃발 날리듯 암담한 시기다. 독립운동도 잘 안 되고 죽을 날만 가까워지니 무슨 일이든 과감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침체 된 독립운동을 새롭게 할 목적으로 피 끓은 의사들을 찾아내 거사를 계획하면서 백범일지를 집필했다.” -백범일지 中-

김구는 해방을 맞아 환국한 후, 미처 기록하지 못한 일과 ‘나의 소원’이란 글을 첨부해 백범일지를 완성한다.

김구는 우리 민족이 독립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을 정립해야 하고, 자신의 철학을 주장할 수 있어야 독립정신을 함양하는 것이고, 진정한 독립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었다. 김구의 이런 생각을 정리한 것이 ‘나의 소원’이다.

한편 이번 백범 김구 이야기는 총 9편으로 △1편 광주 백범기념관 △2편 독립운동의 시작 '치하포 사건'과 보성 은거가 △3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4편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5편 김구의 한인 애국단 △6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과 대한광복군 창설 △7편 광복과 김구의 환국 △8편 미국과 소련에 의한 민족의 분열 △9편 남·북분단과 겨레의 큰 별 지다 순으로 매주 월요일 연재되고 있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