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등산과 의병 이야기2] 호남 최대 무동촌 전투 승전(勝戰)과 김태원 의병장의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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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과 의병 이야기2] 호남 최대 무동촌 전투 승전(勝戰)과 김태원 의병장의 순국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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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촌 전투, 호남 의병 역사상 최대 승전으로 기록
죽봉 김태원 의병장, 38세의 젊은 나이로 23명의 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국
광주 농성지하도-광천터미널-동운고가 ‘죽봉로’ 명명...그의 애국충절 기려
호남 의병 희생정신, 5·18 광주민주항쟁 계승...의(義)로움의 광주정신 역사 기록
죽봉 김태원 장군상/전남 담양군 남면 인안분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죽봉 김태원 장군상/전남 담양군 남면 인안분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45] 정성환 기자 = 어등산(魚登山)은 "물고기가 산으로 올라간다"라는 뜻으로 의병들의 가슴 아픈 죽음을 산으로 간 물고기에 비유한 말이다.

이번 문화역사 이야기는 한·말 호남 의병의 대표적인 전적지로써 골짜기와 산등성 곳곳이 나라를 위해 순국한 호남 의병의 처절한 슬픈 영혼(靈魂)이 잠들어 있는 곳 "한·말 호남 의병 전적지 어등산(魚登山)을 찾아서...제2편 무동촌 전투에서의 승리와 김태원 의병장의 순국 편이다.

김태원 장군 의병전적지/전남 담양군 남면 오동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김태원 장군 의병전적지/전남 담양군 남면 오동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호남 의병 최대의 승전 무동촌 전투

1907년 12월 김태원의 의병장은 부하 장병들이 잠시 추위를 피하고 설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일본군이 찾기 어려운 무등산자락 첩첩산중에 있는 무동촌(현 담양군 남면 무동리)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날이 밝기도 전인 새해 첫날 초병으로부터 ‘의병 잡는 귀신’으로 소문난 광주수비대 ‘요시다’ 부대 150여 명이 ‘무동촌’을 향해 추격해 온다는 급보를 받게 된다. 김태원은 ‘무동촌’의 돌담을 방호벽으로 삼아 사격술이 좋은 포수 출신 의병들을 주요 길목과 돌담 좌우에 매복시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 군경을 제압한다는 전략을 세운다.

김태원의 작전을 알아채지 못한 ‘요시다’가 호남 의병을 얕잡아보고 의기양양하게 말을 타고 무동촌 돌담길에 들어서고 있었고, 의병들의 총구는 요시다를 겨냥하고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광주수비대장 ‘요시다’였지만, 김태원 의병장이 이끈 호남 의병들의 총격을 받고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져 현장에서 즉사하자 일본군은 허겁지겁 도망가기에 바빴다.

김태원은 요시다가 소지하고 있던 일본도를 빼내 그의 목을 베고, 그가 소지한 쌍안경, 육혈포(권총) 등을 거 뒷수습을 한 뒤,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급히 ‘무동촌’을 떠난다. 이 전투가 호남 의병 역사 최대 승전으로 기록된 ‘무동촌 전투’이다.

◆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순국한 기삼연 의병장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의병부대를 결성한 기삼연 의병부대는 장성, 고창, 영광 법성포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그해 12월 겨울철 추위로 세력이 많이 위축된 상태였다. 기삼연은 부대원들이 잠시 추위를 피하고 휴식을 취하게 하려고 담양 추월산 금성산성에 입성했으나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다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의병들은 흩어지고 기삼연 의병장도 간신히 금성산성을 탈출해 순창에 있는 지인의 집에서 부상을 치료하며 은신하던 중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만다.

1908년 1월 1일 기삼연 대장이 일본군에 체포되었다는 비보를 접한 ‘김태원’은 기삼연 의병장을 구하기 위해 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광주로 향했으나, 기삼연 의병장은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체포된 다음 날인 1908년 2월 3일 광주 서천교 백사장(현, 광주대교 부근)에서 일본군의 총살형으로 순국한다.

기삼연 의병장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장성의 기우만과 함께 일본군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으나, 고종황제의 의병해산 조칙에 따라 기우만이 의병을 해산하자,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해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의병장이었다.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해를 삼킨 전년의 꿈도 허망하도다” - 기삼연 의병장이 남긴 절명시-

김태원 의병부대 근거지/ 어등산 토굴 [사진=정성환 기자]
김태원 의병부대 근거지/ 어등산 토굴 [사진=정성환 기자]

 

어등산 의병 길 가는 길 표지판 [사진=정성환 기자]
어등산 의병 길 가는 길 표지판 [사진=정성환 기자]

 

의병길(석봉) 가는 길 [사진=정성환 기자]
의병길(석봉) 가는 길 [사진=정성환 기자]

 

어등산 석봉 [사진=정성환 기자]
어등산 석봉 [사진=정성환 기자]

 

◆ 김태원·김율 형제 의병장의 순국

기삼연이 남긴 절명시(詩)는 김태원의 가슴에 불을 지핀 복수의 피눈물이었다.

기삼연 의병장의 순국 이후 김태원은 동생 ‘율’과 함께 의병부대를 정비해 부대 이름을 ‘호남의소’로 바꾸고, 일본군과의 전투뿐 아니라 일진회원이나 밀정 등 친일파를 처단한다.

김태원의 의병부대는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기민하게 움직이는 청장년으로 조직된 30여 명의 의병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용맹성은 최고였기에 일본군은 김태원 의병장이 이끈 의병부대를 가장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는 41회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장성 토촌 뒷산에 성을 쌓고, 쌍안경을 쓴 채 군도를 차고 다니며 신출귀몰한 게릴라 전술을 펼치며 일본군들을 격살하고 동지들의 복수전을 전개해나간다.

우리 역사에서 의병은 가장 처절하고 용맹한 사람들이었다.

짓밟힌 나라, 도륙당하는 이 나라 사람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 결단하고 목숨을 내건 이들의 무기는 오로지 구국을 향한 절박한 ‘마음’이었다.

김태원이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이 되고 ‘호남의소’ 의병장이 되어 일제 군경과 목숨을 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애국충절의 뜨거운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본군에게 전라도 의병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사전에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고 그 최대 격전지는 어등산이었다.

그들은 김태원 의병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1945년 4월 25일 광주지역 수비대와 헌병부대를 포함한 8개 부대가 김태원 의병부대의 근거지인 어등산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감행한다.

이날 의병장 김태원은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혀져 오자 죽음을 예감한다.

그는 부하들에게 “나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에 이미 결정되었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장차 왜놈의 칼날에 죽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恨)이다.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으니 뒷일을 힘써 도모함이 옳다”라며 부하들에게 피신을 명령하지만, 부하들은 “위기에 처한 대장을 홀로 남겨둘 수 없다”라며 끝까지 항전할 것을 결심한다.

1908년 4월 25일, 의병장 김태원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23명의 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다.

호남을 누비며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전혜산 의병부대의 김원범·조경환 의병장·양동환 의병부대도 모두 어등산에서 싸우다 전사하고 김태원의 동생 김율도 신기리(현 송정동)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된다.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하기 한 달 전 광주감옥에 갇혀있던 김태원의 동생 ‘김율’은 전사한 김태원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연행 도중 탈출을 시도하다 26세의 나이로 총살당한다.

이처럼 김태원·김율 형제는 불꽃처럼 뜨겁게 자신들을 불사르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 광주 어등산에서 순국한 것이다.

이처럼 어등산은 김태원·김율 형제 등 의병들의 넋이 잠들어 있는 곳이며, 슬픈 역사의 흔적이 깃든 곳이다.

김태원 의병장이 체포되기 전 일제는 김태원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그의 10살 난 아들 김동술을 데려다 모진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남편의 죽음을 알고 일제에 능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뜨거운 인두로 얼굴과 가슴을 지졌고, 1919년 3월 1일 “나라가 망했으니 이제 살아갈 이유가 없다”라며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형제와 아내, 자식 등 소중한 모든 것을 걸고 의병의 본분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죽봉 김태원 의병장의 삶과 죽음에서 알 수 있다.

일제는 김태원의 사망 소식을 방을 붙여 알렸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가 아직도 신출귀몰한 모습으로 어디선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그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고 전한다.

담양군 남면 무동리에는 ‘김태원의병장전적비’와 ‘의병전적지’ 표지석이 세워지고, 담양군 남면 인안분교(폐교) 교정 내에는 1979년에 남면 주민들에 의해 김태원 의병장의 무동촌 전투의 승리를 후세에 전하기 위한 동상이 건립되었다.

광주 농성광장에는 죽봉 김태원 장군의 동상이 어등산을 향해 세워져 있다.

광주광역시는 농성 지하도-광천동 버스터미널-동운 고가로 이어지는 거리를 ‘죽봉로’로 명명하여 그의 애국충절을 기리고 있으며,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죽봉 김태원 장군 기적비/나주 남산공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죽봉 김태원 장군 기적비/나주 남산공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죽봉 선생 친필 시비/與舍弟心書(여사제심서)/나주 남산공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죽봉 선생 친필 시비/與舍弟心書(여사제심서)/나주 남산공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김태원 의병장의 편지글 여사제심서(與舍弟心書)

<당서(唐書)>에 나오는‘승패병가상사(勝敗兵家常事)’라는 옛말처럼, 아무리 용맹한 의병부대일지라도 신식무기와 잘 훈련된 일본군과의 장기전에서는 끝까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김태원 의병장은 순직하기 2달 전 사랑하는 아우(율)에게 편지를 남긴다.

“나라의 안위가 기기에 처해 있을 때 사나이는 전장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웃음을 머금고 죽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라며 마음이 흔들린 사랑하는 동생 ‘율’에게 일러주는 마지막 편지가 여사제심서(與舍弟心書)이다.

與舍弟心書(여사제심서)

國家安危在頃刻(국가안위재경각)

意氣男兒何待亡(의기남아가시망)

盡忠竭力義當事(진충갈역의당사)

志濟蒼生不爲名(지제창생불위명)

兵死地含笑入地可也(병사지함소입지가야)

戊申 二月十九日 舍兄金準書(무신이월십구일사형김준서)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온 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義)에 마땅한 일이니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네

전쟁은 죽으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

- 무신(1908년) 2월 19일 형 ‘준’이 쓰다.

◆ 한·말 호남 의병의 희생과 의(義)로움의 광주정신

한·말 의병항쟁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원인이 되어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동학 농민군들의 잔여세력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을미의병으로부터 시작된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민종식·최익현 등 유생 의병장과 태백산 호랑이로 불린 신돌석 등 평민의병장이 등장한다.

1907년 고종황제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분노한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의 규모와 전력이 강화되었고, 의병 전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호남지역에서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이유는 역사적으로 전라도 지역 사람들은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섰다.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활약한 의병도 호남인이었고, 1894년 동학혁명의 중심지도 호남이었다.

특히 호남 의병은 1907년 장성의 기우만·기삼연이 주도한 병력 500여 명 규모의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고 광주향교가 호남 의병의 본거지가 되면서 일본과의 의병 전쟁이 본격화되고 나주에서는 안종수 등이 단발령을 주도한 관원들을 처형하고 창의소를 세워 의병활동을 전개해나간다.

그러나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이후 고종의 단발령 철회와 의병해산 조칙이 발표되고 조정의 강경정책에 의해 나주에서는 단발령을 주도했던 안종수를 처형한 해남군수 정석진, 김창균(광주 3‧1운동의 주역 김철의 부친)등 관련자들이 정부군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광주에서도 기삼연을 중심으로 한 의병부대를 제외하고, 기우만 의병부대가 자진 해산하게 된다.

이 무렵 호남지방에서는 기삼연이 이끈 ‘호남창의회맹소’외에 다수의 의병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맹인 의병장 백낙구는 구례의 중대사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해 광양 관아를 습격했고, 창평의 고광순(1848~1907)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비통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장성의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에 의해 해산당한다.

을사늑약 이후 면암 최익현 의병에 참여했으나 고종황제의 어명으로 의병이 해산되자,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不遠復(불원복)’이라고 쓰인 태극기를 내걸고 지리산을 무대로 일본군과 힘겨운 전투를 펼치다 1907년 10월 16일 피아골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동지 13명과 함께 순국한다.

일제는 ‘한·일 병탄’을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인 호남 의병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들은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간 보병 2개 대대와 해군함정까지 동원한 대규모 군사작전(남한대토벌작전)을 벌이며 의병들의 본거지를 포위하고 의병과 연루되어 있다고 의심되거나 전술적으로 의병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마을들은 가차 없이 불사르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103여 명의 의병장과 4천여 명의 의병들이 죽거나 체포된 가운데 남도의 대표적 의병장인 전해산, 심남일, 양진여·양상기(父子), 김원국·김원범(兄弟), 안규홍(보성, 머슴 출신) 등이 순국한다.

광주 출신 양진여·양상기 부자(父子)의병장은 대구감옥에서 두 달 간격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교수형을 당한 전국 유일 의병장이었다.

‘양진여’는 지금의 광주 북구 중흥동에서 주막집을 운영했다고 한다.

1908년 나라가 망해간다는 얘기를 듣고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광주 일대에서 친일파들을 찾아내 응징하다가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양상기’는 ‘양진여’의 아들로 광주경찰서 순사(경찰)였으나 아버지의 의병활동으로 직장을 잃고 그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08년 8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해 의병을 일으킨다.

그는 광주·담양·창평·장성 등지에서 일본기관을 파괴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전과를 올리며 의병활동에 전념하다, 1909년 담양에서 일본 경찰과 전투 중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김원국은 김원범의 형으로 1905년 송정리 시장에서 일본 군인을 타살한 뒤 피신하다가 1906년 아우 김원범과 함께 광주 무등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했다.

1907년 광주에서 일본군과 접전 중 체포되어 목포로 압송 중 일본군을 처단하고 탈출해 김원범과 합류, 담양 무동촌에서 김태원과 함께 헌병 대장 요시다를 죽이고 일본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1909년 장성·나주·창평 등지에서 의병 전쟁 중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김원범은 의병장 김원국의 아우이다.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1906년형(원국)과 함께 무등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 1월 김태원 의병장과 함께 무동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그해 어등산 전투에서 일본군에 참패를 당하자 1909년 ‘대동창의단’을 조직해 활약했다. 그해 2월 무등산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자결한다.

이 밖에도 생포되어 목숨을 부지한 의병들은 삭발당하고 귀순자 교육이라는 구실로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광주~목포 간 국도 1호선과 해남~하동 간 국도 2호선은 의병 포로들이 2년의 강제노역으로 건설한 신작로로써 지금의 국도 1·2호선은 우리 선열들의 항일 의병투쟁의 피와 눈물, 땀과 한으로 만들어진 도로이다.

패망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 바쳐 분연히 일어선 한·말 호남 의병은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자취를 감추었지만, 살아남은 의병의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탈출해 조국의 수호신이 되어 독립군으로 활약한다.

이처럼 대한제국 말기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본군과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목숨을 버려야만 했던 호남 의병의 희생정신은 일제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과 1980년 전두환 군부 쿠데타 세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항거한 5·18 광주 민주항쟁으로 계승되어 의(義)로움의 광주정신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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