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등산과 의병 이야기1] 어등산과 김태원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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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과 의병 이야기1] 어등산과 김태원 의병장
  • 정성환·고훈석(광산) 기자
  • 승인 202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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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魚登山), '물고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의병들의 가슴 아픈 죽음을 산으로 간 물고기에 비유'
광주 어등산(魚登山), 한·말 호남 의병의 대표적 전적지, 호남 의병의 슬픈 영혼(靈魂)이 잠들어 있는 곳
죽봉 김태원, 동생 김율과 함께 그 이름만으로도 일본 군경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호남의 대표적 의병장 '평가'
어등산에 설치된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44] 정성환·고훈석(광산) 기자 = 어등산(魚登山)은 "물고기가 산으로 올라간다"라는 뜻으로 물고기가 물에서 놀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면 죽는 것인데, 의병들의 가슴 아픈 죽음을 산으로 간 물고기에 비유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번 문화역사 이야기는 한·말 호남 의병의 대표적인 전적지로써 골짜기와 산등성 곳곳이 나라를 위해 순국한 호남 의병의 처절한 슬픈 영혼(靈魂)이 잠들어 있는 곳 "한·말 호남 의병 전적지 어등산(魚登山)을 찾아서...제1편 어등산과 김태원 의병장" 이야기다.

죽봉 김태원 의병장 동상/광주광역시농성광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어등산에 설치된 한말 호남의병 어등산 전적지 안내판 [사진=정성환 기자]
어등산 의병길(석봉~등용문~황새봉)/1.9km [사진=정성환 기자]
어등산 의병길(석봉~등용문~황새봉)/1.9km [사진=정성환 기자]

◆ 한·말 의병의 봉기

우리나라 근·현대사 의병의 출현은 1894년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내건 동학 농민운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촉발된 을미 의병,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의한 을사의병,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의한 정미의병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면서 제천의 유인석 등 지방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의병봉기가 이루어졌는데, 전남은 1896년 장성의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시작된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하며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신돌석과 같은 평민의병장이 등장하고, 전국에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한 가운데 호남에서는 유학자 최익현이 신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1907년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투신하면서 의병 전쟁으로 확산되었고, 유생의병장들은 이인영을 총 대장으로 13도 연합의병의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 무렵 전남에서는 죽봉 김태원이 함평과 나주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700여 명의 의병을 결성해 결사 항전에 나선다.

이후 일제는 호남 의병을 제거하기 위한 ‘남한대토벌작전’을 펼치며 무자비한 살육, 방화,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호남 의병의 국내 활동은 좌절되었고, 평안도에서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이 체포됨으로써 국내 의병활동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인 1907년 광주 어등산(魚登山, 339m)은 김태원·김율 형제를 비롯해 김원국·김원범 형제, 오성술·양동한·전해산·조경환 등 호남 의병장들이 근거지로서 일본 군·경들과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의병항쟁 전적지였다. 어등산 앞에는 황룡강이 흐르고 어등산 정상 석봉(石峯)에서는 인근의 함평, 장성, 나주, 담양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또한, 골짜기가 깊어 게릴라 전술을 펼 수 있는 천혜의 지형이었기에 호남 의병들의 주요 근거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호남 의병은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1908년 4월 김태원·김율 의병장 등 23명, 1909년 1월 조경환·김원범 의병장 등 20명, 9월 양동환 의병 부대원 10명 등 수 많은 의병이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격전 끝에 순국한다.

이처럼 어등산은 한·말 호남 의병의 대표적인 전적지로써 골짜기와 산등성 곳곳이 나라를 위해 순국한 호남 의병의 처절한 슬픈 영혼(靈魂)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어등산(魚登山)은 ‘물고기가 산으로 올라간다’라는 뜻으로 물고기가 물에서 놀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면 죽는 것인데, 의병들의 가슴 아픈 죽음을 산으로 간 물고기에 비유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사학자인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 1859~1925) 선생은 “각 도의 의병을 살펴보면 전라도 지역이 가장 성했는데 지금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으니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라고 서술하면서 전라도의 의병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실제 1900년에 일어난 의병 전투 중 47.4%가 전라도에서 일어났고, 참여 의병 60%가 호남사람이었는데 그중 광주 전남 출신이 45%를 차지한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한·말 호남 의병의 활약 시기를 보면 제1기(1906~1907)는 최익현·고광순·기삼연 의병장, 제2기(1908년)는 김태원·김율 의병장, 제3기(1909년)는 전해산·심남일·안규홍 의병장이 활약했다.

보성 출신 안규홍은 담살이라 불리는 머슴 출신 의병장이었고, 나주의 김태원과 김율은 형제였으며, 광주의 양진여와 양상기는 부자(父子)지간이었다.

이들 의병장 중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의병장은 죽봉 김태원과 그의 동생 김율 의병장이었다고 전한다.

‘석봉’에서 바라본 어등산. 이곳 ‘석봉’에서 김태원 의병장이 쌍안경으로 적의 동태를 살폈다고 전한다. [사진=정성환 기자]
‘석봉’에서 바라본 어등산. 이곳 ‘석봉’에서 김태원 의병장이 쌍안경으로 적의 동태를 살폈다고 전한다. [사진=정성환 기자]
한·말 호남 의병 어등산 전적지/토굴 가는 길 [사진=정성환 기자]
한·말 호남 의병 어등산 전적지/토굴 가는 길 [사진=정성환 기자]
김태원 의병장 토굴/어등산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김태원 의병장 토굴/어등산 소재. 어등산에 있는 토굴은 김태원 의병장의 의병부대가 일제 군경의 눈을 피해 숨어지내던 곳으로
의병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다 순국한 전적지이다. [사진=정성환 기자]

◆ 죽봉 김태원(김율, 1870~1908) 의병장

애국지사 매천 ‘황현’은 “죽봉은 기발한 전략으로 1년여 동안 수백 명의 일본군을 죽였으며 부하를 엄히 다스려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며 죽봉 김태원을 유능한 의병장으로 평가했다.

죽봉 김태원은 전투에 임할 때마다 기발하고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일제를 곤경에 빠트리고 그 이름만으로도 일본 군경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호남의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김태원은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 상하마을(갈마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죽봉(竹峰) 본명은 준(準)이다.

그가 ‘순릉참봉(順陵參奉)’으로 있을 때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밖에 없는 혼란의 시대, 변혁의 시대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자 사회개혁에 관심이 있었던 김태원은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해 활동하지만 이내 실망하고 귀향하게 된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고을 아전들의 비리와 횡포를 바로잡기 위해 관찰사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고 주민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고 전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김태원은 비분강개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1906년 동생 김율(1882~1908)과 함께 600여 명의 의병을 결성해 ’기삼연(1851~1908) 의병장이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에 들어가 나주 함평 등지에서 활약하게 된다.

김태원과 김율은 용맹한 형제로 소문이나 자자해 ‘난형난제(難兄難弟)’라 칭하며 당시 사람들은 참봉으로 불리던 ‘김태원’의 의병부대를 ‘참봉진’, 박사로 불리던 ‘김율’의 의병부대를 ‘박사진’으로 불렀다고 한다.

김태원 의병부대가 ‘호남창의회맹소’에 합류한 이후 첫 전투는 고창에서 치러지는데, 1907년 9월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의병장 기삼연과 전략을 짜고 있던 와중에 일본 군경에 기습 공격을 당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의병부대는 당황했지만, 김태원은 침착하고 의연하게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의병이 적을 만나 도망하는 것은 바른 계책이 아니다.

이 캄캄한 밤중에 험한 길을 빠져나가 살기를 바랄 수도 없다.

이왕 죽을 바에야 왜적과 싸우다 죽자.

왜적은 대대로 우리의 철천지원수다. 모두 한 놈도 남김없이 쏘아라!”

김태원의 명령에 사기가 높아진 의병들의 총격에 일본 군경들이 하나둘 쓰러져 가자 기습당한 의병을 우습게 보던 일본 군경은 김태원의 침착한 방어와 공격에 도리어 당황하게 된다.

사기충천한 의병들의 파상공격으로 전의를 상실한 일본 군경이 퇴각하면서 전투는 의병들의 승리로 끝난다.

이를 지켜본 기삼연 의병장은 문수산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운 김태원을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으로 임명한다.

고창 문수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주민들에게서 무기와 군량미를 얻은 의병들은 영광·부안·정읍·광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며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세곡을 탈취하러 법성포로 향한다.

법성포로 진격한 의병들은 법성포 순사주재소, 우편소, 일본인 가옥 등을 기습해 불태우고 곡식 창고를 털어 군량미로 쓰고 남은 것은 모두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전과를 올린다.

1907년 12월 전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장성 백양사 약사암에서 선봉장 김태원이 기삼연 의병장과 향후 전략을 협의하게 되고, 이들은 전투력 극대화를 위해 ‘호남창의회맹소 ’연합부대를 둘로 나눠 각기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의병을 더 모으고 게릴라 작전을 펴기로 합의한다.

그때부터 김태원 의병부대는 ‘호남창의회맹소’에서 독립하여 함평, 영광, 나주 등지를 돌며 부 백의 의병을 모은 뒤 동생 ‘김율’과 부대를 나누어 활동하게 된다. 이것은 소규모 부대의 게릴라 전술이 더욱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김태원·김율 형제 의병부대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때로는 연합작전으로 일본군 토벌대와 맞서 전투를 치른다.

 

<제2편 무동촌 전투 승리와 김태원 의병장의 순국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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