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이야기6] '18년 만의 귀향(歸鄕)...다음 세상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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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이야기6] '18년 만의 귀향(歸鄕)...다음 세상을 기다리며'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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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유배 생활 중 집필한 저술 정리 「여유당전서」 완성...실학사상 집대성
"정약용의 학문적 깊이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역사 평가
"부국강병의 개혁을 꿈꿨던 정조와 정약용...그 미완의 꿈은 아쉬울 것" 기록
茶山 정약용(1762~1836)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43]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조선 시대 천재 실학자로 칭송받은 『다산 정약용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서』 마지막 편인 제 6편 '18년 만의 귀향...다음 세상을 기다리며'이다.  

전라남도 강진군에 소재한 실학의 산실 다산초당. [사진=정성환 기자]
전라남도 강진군에 소재한 실학의 산실 다산초당. [사진=정성환 기자]

◆ 자상한 아버지 정약용

정약용은 자식에 대한 사랑 또한 각별했다.

정약용이 1801년 강진으로 유배 갈 때, 아들 학연·학유는 18세와 15세이고 딸 홍연은 일곱 살이었다. 어린 자식들이 죄인의 후손으로 멸시받으며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정약용은 살이 찢겨나가는 심정이었다.

아버지가 중죄인으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으므로 정약용 집안은 폐족(廢族)이 되어 아들들이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 아들들에게 자포자기하지 않고 용기와 신념을 지니고 학문에 몰두하도록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서신을 통해 자상하고 간절하게 아들들을 설득하고 가르쳐주는 일을 훌륭히 수행했고, 자식들 또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학문에 정진했다.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더욱 잘 처신하여 본래보다 훌륭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 하는 것뿐이다.

독서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일 뿐만 아니라, 호사스러운 집안 자제들에게만 그 맛을 알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촌구석 수재들이 그 심오함을 넘겨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도 있는 데다 중간에 재난을 만난 너희들 같은 젊은이들만이 진정한 독서를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다.”

- 아들에서 보낸 편지 中 -

“폐족으로 망했다고 실망하지 말고 책을 통해서 좀 더 노력하면 벼슬을 하지 않아도 잘살 수 있다”라는 편지글에서 정약용(茶山)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충고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정약용의 부부 사랑도 각별했다고 한다.

15세의 총각과 16세의 처녀로 만나 25년을 금실 좋게 살던 부부는 정약용이 40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역적죄인이 되어 41세의 아내를 고향에 남겨두고 기약 없는 유배를 떠나야 했다.

梅鳥圖(매화병제도)/다산박물관 소재(영인본). [사진=정성환 기자]
梅鳥圖(매화병제도)/다산박물관 소장(영인본). [사진=정성환 기자]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하피첩(霞帔帖) /다산박물관 소장(영인본). [사진=정성환 기자]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하피첩(霞帔帖). 경직의방(敬直義方)이란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공경함으로 마음을 고르게 하고(敬以直內), 의로움으로 행동을 바르게 하라(義以方外)’는 뜻이다. 다산박물관 소장(영인본). [사진=정성환 기자]

◆ 하피첩(霞帔帖)

1810년 정약용이 다산초당에 있을 때 부인 홍혜완은 자신을 잊지 말라는 정표로 그리움과 안부를 담아 30년 전 시집올 때 입었던 빛바랜 붉은색 낡은 치마를 인편으로 보낸다.

이러한 애틋한 부부애는 기나긴 이별에도 그들의 사랑은 변치 않았고, 정약용이 5백여 권이 넘는 저서를 쓰고 학자의 대업을 이룩하는 힘이 되었으며, 57세와 58세의 초로에 유배에 풀려나 18년의 세월을 함께 하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

정약용은 세월이 흘러 색깔이 바랜 아내의 치마를 꺼내 종이를 붙여 다름질하여 하피첩(霞帔帖)이라는 작은 책자 네 개를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었다.

하피(霞帔)는 붉은색 치마란 뜻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 여인이 입었던 예복으로 하피첩이란 ‘노을빛 치마로 만든 소책자’를 뜻한다.

제작연대는 1810년(순조 10년) 무렵으로 현재는 3개의 하피첩이 남아있다.

하피첩에는 두 아들에게 선비로서 지켜야 할 마음가짐을 훈계하는 교훈이 적혀있다. 그것은 경직의방(敬直義方)이란 글귀였다. 경(敬)으로 마음을 바로잡고 의(義)로 일을 바르게 하라는 것이며, 부지런함(勤)과 검소함(儉)으로 재물을 탐하지 말고 평생을 살아가라는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정약용은 남은 치마 한 조각을 간직했다가 매화 가지에 앉아있는 새 한 쌍을 그린 매조도(梅鳥圖, 매화병제도)에 시를 쓴 족자로 만들어 시집간 딸(홍연)에게도 주었다.

“펄펄 나는 저 새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있네

꽃다운 그 향기 짙기도 하여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구나

여기에 둥지 틀어 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려무나

꽃이 이제 다 피었으니

열매도 많이 달리겠네.”

- 매조도에 쓴 시 -

이 시는 훌륭한 남편과 함께 아름다운 삶을 보내고, 후손도 많이 길러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정약용의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고 있는 시로 혼인한 딸 내외를 자기 뜰 매화 가지에 앉아있는 한 쌍의 새처럼 귀여워하는 그의 따스한 정이 흠뻑 녹아있다.

◆ 18년 만의 귀향 그리고 다음 세상을 기다리며

1818년(57세) 정약용에게 유배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제자들은 정약용의 유배 생활을 청산하는 전별연을 마련하고 서로 영원히 잊지 말자고 다신계(茶信契)를 만든다.

정약용은 18년의 한 많은 유배지를 벗어나 꼬박 열사흘을 걸어 꿈에 그리던 고향 남양주 마제마을로 돌아온다.

정약용은 18년의 유배 살이 중에도 서럽고 외로울 때가 많았지만,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온 이후, 행여나 자신들이 천주학쟁이로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정약용을 찾아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약용은 북한강에 배를 띄워 18년의 유배 생활과 세상에 대한 울분과 좌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물 위를 떠다니며 자연인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강진에서 집필한 저술을 정리해 〈여유당집〉을 완성하고,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하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온 지 4년이 흐른 1822년 정약용은 회갑을 맞이해 자신이 살아온 파란만장한 삶을 회고하며, 스스로 자신의 묘지명(墓誌銘)을 써 내려간다.

“이 무덤은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묘다. 본 이름은 약용(若鏞)이요, 자(字)는 미용(美庸), 자(字)는 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 내를 건너듯,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란 뜻에서 지었다.

-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中 -

정약용은 생을 마감하기 사흘 전 회혼(回婚)의 감회를 읊은 詩를 남기고 1836년(75세) 음력 2월 22일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回婚) 날 친척들과 자손들 그리고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75세로 생을 마감한다.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다.

육십 년 풍상의 세월

눈 깜박할 사이 흘러갔으나 복사 꽃 화사한 봄빛은

결혼하던 그해 같네

살아 이별, 죽어 이별로 늙음을 재촉했으나

슬픔 짧고 기쁨 길었으니 임금님 은혜 감사해라”

이 밤 목란사(木蘭詞) 읽는 소리 더욱 정답고

그 옛날 다홍치마엔 먹 흔적 아직 남았다오

쪼개졌다 다시 합한 것 참으로 우리 모습이니

표주박 한 쌍을 남겨서 자손에게 물려주리.

- 정약용의 回詩 -

18년의 유배 생활로 철저히 세상에서 소외되었지만, 육경사서(六經四書)로써 어려운 역경을 견디며 수양했던 조선의 천재 실학자 정약용, 그는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이 당대에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다음 세상에는 자신을 알아줄 사람과, 자신을 알아줄 시대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사암(俟菴)으로 생을 마친다.

1910년(융희 4) 규장각 제학(종1품)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 후대의 평가

정약용은 실학의 토대를 마련한 이익(1681~1763)의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에 영향을 받은 유학자로서 조선 후기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용적인 학문을 주장하며 부국강병(富國强兵)·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세계를 꿈꿨던 조선 최고의 천재 실학자였다.

철학가·경제학자·의학자·과학자이자 탁월한 문학가였던 정약용은 정치적 박해로 인해 당대에 펼쳐 보일 수 없었던 개혁의 꿈을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 등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과 2천 5백 수에 달하는 시를 후세에 남긴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민족의 ‘얼’을 주창한 역사학자 위당 정인보(1893~?)는 새로운 학풍으로 학문과 사회의 변혁을 주장한 학자를 열거하면서, 첫째는 반계 ‘유형원’이고, 둘째는 성호 ‘이익’이며, 셋째는 ‘정약용’이라고 말하며 18~19세기에 활동했던 정약용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천재 학자라고 평가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죽음으로 항거했던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 “그가 남긴 학문적 깊이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그것은 다산의 사상 속에 백성을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유당 전서(與猶堂 全書)/강진 다산박물관 소재(영인본). [사진=정성환 기자]
여유당 전서(與猶堂 全書)/강진 다산박물관 소재(영인본). 다산 정약용 선생 서거 100주년 기념하기 위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시문 등
방대한 저술을 총망라한 문집이다(154권 76책)/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정성환 기자]

◆ 다음 세상을 기다리며

정약용의 호는 다산(茶山)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가 즐겨 사용했던 호는 사암(俟菴)라고 한다.

사암(俟菴)은 ‘암자에서 기다린다’라는 뜻으로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 즉, “뒷날의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함이 없다”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훗날 어떤 성인에게도 자신의 학문은 질책받지 않겠다는 정약용 자신감의 표현이고, 후대를 기다린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자신이 밝힌 학문적 진리에 대한 확신이 강했던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자신이 밝힌 진리가 펼쳐지기를 간절히 원하며 다음 세상을 기다리며 생을 마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변화하는 시대에 부국강병의 개혁을 꿈꿨던 정조임금과 정약용, 그 미완의 꿈을 역사는 아쉬움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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