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이야기2-2] 정약용과 천주교 그리고 12년의 관직 생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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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이야기2-2] 정약용과 천주교 그리고 12년의 관직 생활(하)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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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 격화 속...1789년(정조 13년, 27세) 정조의 총애, 개혁의 아이콘으로 등장
암행어사 파견. 피폐한 백성들 비참한 현실 분노...애민사상은 후에 실학사상 승화
"정약용은 목민관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실현한 위대한 정치가로 역사는 기록"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39]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조선 시대 천재 실학자로 칭송받은 '다산 정약용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서' 제2-2편 정약용과 천주교 그리고 12년의 관직 생활(하)이다. 1~2편에 이어 △3편 개혁 군주 정조의 죽음과 사라져간 정약용의 꿈 △4편 강진 유배 생활 18년의 여정 △5편 정약용의 애민정신 1표 2서(一表二書) △6편 18년 만의 귀향, 다음 세상을 기다리며는 매주 월요일 연재된다

장안문(長安門)/수원 화성의 북문(정문)이다. 정조는 장안(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원(륭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했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 다시 복원됐다. [사진=정성환 기자]북수문 北水門 (화홍문華虹門)/수원화성
장안문(長安門)/수원 화성의 북문(정문)이다. 정조는 장안(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원(륭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했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 다시 복원됐다. [사진=정성환 기자]

◆ 다산 정약용의 12년 관직 생활(하)

북수문 北水門 (화홍문華虹門)/수원화성. 북수문(北水門)은 수원화성의 북쪽 성벽에 있는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에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어 화옹문(華虹門)이라 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이다. [사진=정성환 기자]
북수문 北水門 (화홍문華虹門)/수원화성. 북수문(北水門)은 수원화성의 북쪽 성벽에 있는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에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어 화옹문(華虹門)이라 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이다. [사진=정성환 기자]

◆ 당쟁의 격화 속에 등장한 정약용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 정책을 시행했지만, 이미 당파싸움에 매몰된 조정 대신들의 갈등을 해소하기에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영조 시대에 확고한 세력기반을 확보한 노론의 일당독재는 소론과 친선관계를 유지했던 사도세자를 음해해 죽음에 이르게 했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지하는 노론 중심의 벽파와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소론·남인 중심의 시파로 갈라져 또 하나의 당파분열이 일어난다.

당시 성리학(性理學)에 매몰된 지식인이나 관료들은 숭명배청(崇明排淸)에 빠져 백성을 위한 정치는 뒷전이었고, 겉으로는 임금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내세우지만, 그것은 거짓된 명분에 불과했다. 그들은 오직 자기 당파의 권력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끊임없이 반대파를 역모로 몰아 유배시키거나 처형했다. 이러한 노론 벽파의 악행으로 사회는 분열되었으며, 관료들의 부패와 탐학은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1776년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즉위한 정조는 조선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해줄 세력으로 남인 시파의 영수 ‘채제공’을 등용해 왕권 강화와 부국강병을 꿈꾸며 개혁과 탕평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 정약용은 1789년(정조 13년, 27세) 식년시에 급제하면서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개혁의 아이콘으로 정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수원화성/성곽 둘레길 5.7km. [사진=정성환 기자]
수원화성/성곽 둘레길 5.7km. [사진=정성환 기자]

◆ 암행어사 정약용

1794년(33세) 정약용은 부친상을 마치고 홍문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 무렵 정조는 경기도 각 읍의 수령들의 잘못을 규찰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파악하기 위해 정약용을 암행어사로 파견한다.

정약용은 피폐한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에 분노한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백성들의 아픈 곳을 보듬었고 탐관오리들의 악행을 낱낱이 파헤쳐 처벌하도록 했다. 특히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가 향교터를 빼앗아 자신의 가족묘로 쓴 사실을 파헤쳐 그와 관련된 자들을 처벌하고 그의 탐욕스러움을 고발하여 파직시킨다. 이 사건은 정약용의 관직 생활에 평생 커다란 악연으로 작용하지만, 이처럼 폭정을 일삼는 관료들로부터 굶주리고 핍박받는 백성들을 구하는 것은 당시 국가가 해결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었고 관료로서 그가 실천해야 할 의무였다. 이러한 그의 애민 사상은 실학사상으로 승화되어 훗날 18년의 유배 시절에 써 내려간 1표 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1795년(34세) 암행어사의 소임을 마치고 돌아온 정약용은 승정원 우부승지(정3품)에 임명된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권력을 잡은 노론세력을 견제하고 혼탁한 정국을 개혁하기 위해 남인 세력을 키우려 했던 정조에게 정약용은 총명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의 계획은 천주교 문제로 노론 벽파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밀입국해 천주교를 전도한 사실이 발각되자, 이를 계기로 노론 벽파들은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들을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정조는 천주교 신앙문제로 공격의 표적이 된 정약용을 안타깝게 여겼다.

결국, 노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정조는 정약용을 당상관 정3품 우부승지에서 충청도 금정역(지금의 청양군) 찰방(종 6품)으로 좌천시키게 된다.

정조는 그를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충청도 지방으로 내려보내 천주교도들을 교화시켜 그에게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날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조는 정약용을 신뢰했고 총애했다.

이 사건은 정약용이 한때 천주교 신앙에 심취했고 그의 친지들이 천주교의 핵심인물들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만, 그가 임금의 총애를 받은 신하로서 반대파의 끊임없는 견제와 탄압 속에 그의 관직 생활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민각(與民閣)/수원화성 행궁 앞 소재. 여민(與民)은 백성과 함께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완공하고 행궁 앞 십자로에 설치했던 종각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소실되었다. 2008년 10월 그 터에 새로운 종각을 세우고 백성을 깊이 사랑한 정조 대왕의 마음을 담아 종각 이름을 여민각(與民閣)이라 지었다고 한다. [사진=정성환 기자]
여민각(與民閣)/수원화성 행궁 앞 소재. 여민(與民)은 백성과 함께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완공하고 행궁 앞 십자로에 설치했던 종각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소실되었다. 2008년 10월 그 터에 새로운 종각을 세우고 백성을 깊이 사랑한 정조 대왕의 마음을 담아 종각 이름을 여민각(與民閣)이라 지었다고 한다. [사진=정성환 기자]

◆ 목민관으로서 실학을 실천한 정약용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좌천된 지 1년 6개월이 지난 1797년(36세)에 지금의 대통령 수석 비서관 격인 동부승지(정3품)에 임명된다.

정약용의 부활은 노론에 대한 정조의 정면승부였기에 노론 벽파들의 비판은 갈수록 집요했다.

정약용은 노론들이 자신을 천주쟁이로 공격하지 못하게 할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과 관련된 천주교와의 모든 것을 상세히 밝히기로 작정하고 1797년(36세) 6월 정조에게 노론 벽파들의 비방에 대해 자신을 변명하고 변호하는 동부승지 사직 상소(변방사동부승지소, 辨謗辭同副承旨疏)를 올리게 된다.

정약용은 사직상소문에서 자신이 천주교에 물들게 되고 벗어나게 된 경위를 소상히 밝히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적극적으로 해명한다.

정약용은 자신이 젊었을 때 천주교 신앙에 빠져들었던 사실을 솔직하게 시인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정도로 깊이 빠진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이 벼슬길에 나온 이후로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을 겪으면서 천주 교리가 인륜과 천리에 거슬리는 것임을 깨달아 분개하고 가슴이 아파 천주교를 원수같이 미워했으나 주변에서 천주학쟁이란 의심을 거두지 않으니 억울하다는 심정을 토로한다.

수천 글자에 이르는 정약용의 상소문은 조정 대신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정조 임금을 감격하게 했다.

그만큼 그의 상소문은 그가 천주교에 빠진 자라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며, 그 비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자신이 임금의 측근에서 벗어나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파묻히는 길밖에 없음을 호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노론 벽파들의 비난은 그치지 않았다.

정조는 어찌할 방도가 없어 정약용을 외직인 황해도 목민관(곡산부사)으로 내보내게 된다. 이것은 노론 벽파로부터 정약용을 보호하고 싶었던 정조 임금의 고육지책이었다.

목민관으로 부임한 정약용은 백성들의 생활상을 직접 확인하고 고을의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고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는 행정을 펼쳐나간다.

백성 위에 군림하는 권위적 태도를 거부하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 주고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또한, 그는 천연두의 치료법을 정리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 12권을 저술했다. 그 당시 천연두로 죽는 어린이가 많았으며 천연두 치료법 연구는 바로 백성을 구제하는 가장 큰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훗날 이러한 목민관으로서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목민관이 가져야 할 양심과 실천해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를 18년의 유배 생활 중 〈목민심서〉에 담아낸다. 정약용은 이처럼 황해도 곡산 부사로 있는 2년여 동안 그의 실학사상을 행정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완벽히 수행해 내면서 자신의 관직 생활 중 가장 빛나는 시절을 보내면서 백성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정약용은 이처럼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실현한 위대한 정치가였다.

이처럼 정조의 아낌없는 신임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정약용은 1799년(38세) 황해도 곡산을 떠나 다시 조정에 돌아와 형조참의(정3품)를 제수받고 소송사건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해 나간다.

그러면 그럴수록 정약용에 대한 임금의 총애는 갈수록 깊었고, 노론 벽파의 공격은 더욱 날카로웠다.

봉수당(奉壽堂)/수원화성 행궁 정당(正堂). 임금 행차 시 정전(正殿)으로 쓰인 곳으로 정조대왕은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다. [사진=정성환 기자]
봉수당(奉壽堂)/수원화성 행궁 정당(正堂). 임금 행차 시 정전(正殿)으로 쓰인 곳으로 정조대왕은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다. [사진=정성환 기자]

◆ 귀향

1799년(38세) 남인의 정치적 스승이었고 정조의 충직한 신하였던 번암 채제공 선생이 생을 마감하자 노론 벽파들의 공격은 극에 달했으나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은 정약용을 제거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노론 벽파들은 교활하게도 정약용의 측근인 이가환과 정약종 등 남인 시파들을 천주교 신자라는 약점을 또다시 들춰내고 비판하며 관직에서 물러나게 한다. 당시 가족이 죄를 범해 관직에서 물러나면 벼슬자리에 있는 다른 가족도 벼슬에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다. 노론들은 비겁하게도 이러한 점을 이용한 것이다.

정약용은 분노했다. 그리고 세상이 혐오스러웠다. 그는 자명소(自明疏, 자기의 죄가 없음을 스스로 변명하는 상소)를 올리고 직무에 나가지 않았다.

정약용은 사직을 간청하면서, 젊은 날 자신이 천주교 신앙에 빠져 세례를 받은 사실 때문에 벼슬살이를 시작한 이후 끊임없이 불안 속에 지내왔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 친지들이 천주교에 빠졌다는 죄명으로 탄핵을 받은 상황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벼슬을 버리고 조정을 떠나 반대파 공격의 표적이 되지 않는 길밖에 없음을 호소하며 사직의 이유를 밝힌다.

정조는 계속 만류했지만, 정약용은 계속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의 벼슬길의 마지막이었고 1800년(39세) 봄 정약용은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처자를 데리고 고향 마재로 돌아와 ‘여유당’이란 현판을 내걸고 은신에 들어간다.

장락당(長樂堂)/수원화성 행궁.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열면서 혜경궁 홍씨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정조가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어머니를 위해 장락궁을 지은 것을 본받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장락당(長樂堂)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다고 한다. [사진=정성환 기자]
장락당(長樂堂)/수원화성 행궁.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열면서 혜경궁 홍씨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정조가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어머니를 위해 장락궁을 지은 것을 본받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장락당(長樂堂)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다고 한다. [사진=정성환 기자]

 

<3편 개혁 군주 정조의 죽음과 사라져간 정약용의 꿈>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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