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이야기2-1] 정약용과 천주교 그리고 12년의 관직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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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이야기2-1] 정약용과 천주교 그리고 12년의 관직 생활(상)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8.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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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의 혼이 살아 숨 쉬는 다산초당을 찾아서...6편 연재 중 2편
23세 대과 준비 시 천주교 처음 접해...처음엔 학문으로 후에 신앙으로 받아들여
수원 화성 축성 등 치적...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38]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조선 시대 천재 실학자로 칭송받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서'로 제2편 정약용과 천주교 그리고 12년의 관직 생활이다. 1~2편에 이어 △3편 개혁 군주 정조의 죽음과 사라져간 정약용의 꿈 △4편 강진 유배 생활 18년의 여정 △5편 정약용의 애민정신 1표 2서(一表二書) △6편 18년 만의 귀향, 다음 세상을 기다리며는 매주 월요일 연재된다.

수원화성/화서문 서북공심돈 [사진=정성환 기자]

 

◆ 천주교에 심취한 정약용과 ‘을사추조적발사건’

조선 후기 중국으로부터 전래한 천주교 신앙과 과학기술을 서학(西學) 또는 천주학이라고 했다.

18세기 말 조선 시대 천주교는 종교가 아닌 유교 사상과 천주교를 조화시키려는 학문적 관점에서 관직에서 소외된 남인의 소장파 유생들 사이에서 탐구되고 있었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처음 접한 시기는 1983년 소과에 급제해 성균관에서 대과 시험을 준비하던 1784년 23세 때였다.

그 무렵 정약용은 고향에 내려와 큰형수(큰형 정약현의 처)의 제사를 마치고 배를 타로 서울로 돌아가 길에 사돈인 이벽(큰형수의 동생)을 만나 천주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천주교 교리에 심취하게 된다.

정약용은 그만큼 열린 마음이었고, 천주교 교리는 그에게 새로운 진리이자 깨달음이었다. 정약용이 처음으로 천주교를 대할 때는 서양의 학문으로 생각했으나, 매형 이승훈으로부터 ‘요한’이란 세례명을 받을 즈음에는 천주교를 학문이 아닌 새로운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그의 폭넓은 사상의 수용과 포용적 자세는 후일 실학을 집대성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지만, 후일 정약용의 천주교 입문은 두고두고 그의 관직 생활에 커다란 불운으로 다가온다. 당시 천주교는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1785년(24세) 정약용은 정약종·이승훈·이벽 등과 천주교도들이 명례방(현,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비밀신앙집회를 하다가 발각되어 형조에 구금되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하고, 이 소식을 접한 일부 유생들은 천주교 교리가 국가의 지도이념인 성리학적 윤리 체계를 파괴한다며 이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그러나 정조는 “서학(천주교)은 한때의 유행일 뿐이니 성리학자들이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우면 천주교는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며 김범우를 유배 보내고 다른 유생들은 모두 석방한다.

정조에게 천주교는 서양의 과학기술과 같은 존재로 인식했고, 천주교를 배척의 대상이 아닌 유교를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으로 수용하려는 관대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후대에 ‘명례방공동체’라고 불리게 되며, 113년이 지난 1898년 ‘명례방공동체’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명례방(명동)에 명동성당이 건립된다.

배다리/노량주교도섭도/수원 화성박물관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한강 배다리 건설

1789년 정조는 재위 13년 만에 경기도 양주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현륭원(顯隆園)으로 무덤을 옮겨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복권과 추존을 계획한다.

정조는 대역 죄인으로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어 그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싶었으며 그것이 부모에 대한 효(孝)라 생각했다.

또한,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는 데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수원은 도성을 방어하는 남방의 주요거점이었고, 영남·호남·충청에서 서울로 물자가 이동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기에 수원을 제2의 도성으로 발전시켜 왕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렇듯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달램과 동시에 정치·경제·군사적 목적은 물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수원 화성 축성을 계획한 것이다.

정조는 한성에서 수원을 오고 가기 위해서는 수천 명의 사람과 수백 필의 말이 한강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배 다리를 건설해야 했다.

배다리는 단순히 임금이 한강을 건너는 다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정조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가슴 맺힌 한을 풀기 위해 눈물을 삼키면 건너는 길이기 때문에 국가적인 중요한 사업이었다.

배다리 설치는 한강 폭 만큼의 여러 배를 질서정연하게 가로로 배열해 이어 묵고 널빤지를 깔아 서로 다른 크기의 배를 연결하는 것으로, 수학적 계산능력이나 과학기술의 원리를 응용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이때 정조는 과학적인 수학 원리와 재능이 뛰어난 정약용에게 한강 배다리 설치 임무를 맡기게 된다.

정약용이 벼슬에 나가던 첫해인 1789년(28세) 이처럼 중대한 임무를 맡았다는 사실은 그가 정조에게 얼마나 많은 총애와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당시 여러 배다리 제작 기록을 보면 연산군 때는 왕의 행차 때마다 배다리 제작에 고깃배 200~800여 척이 동원되어 어민들의 피해가 심했다고 한다.

이에 정약용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2천여 명이 340m 한강을 안전하게 지나갈 배다리를 설치하기 위해 어민들의 배가 아닌 대형 조운선 36척을 이용해 배다리를 완성한다.

이러한 결정은 백성의 삶을 먼저 살핀 정약용의 애민정신이었다.

◆ 열흘간의 유배 생활

1790년(29세) 배다리를 완성한 정약용은 우의정 채제공의 천거로 예문관 검열(정9품)에 임명되었으나 노론 벽파의 반발에 부딪히자 두 번의 사직상소를 올리고 조정을 떠난다. 정조는 정약용을 부르지만 입궐하지 않았다. 정조 임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정적인 노론 벽파의 거센 공격으로부터 정약용을 보호하고 싶었다.

정조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정약용을 충청도 해미(충남 서산군 해미면)로 열흘간의 유배를 보내게 된다. 이 사건은 정조의 총애와 신임을 받은 정약용에 대한 노론 벽파의 견제와 비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최초 천주교도 탄압사건 (신해사옥)

1791년(30세) 전라도 진산에 사는 윤지충과 권상연 두 선비가 윤지충의 모친상 때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사건이 발생하고,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큰 파문을 일으킨다. 결국, 윤지충은 노론 벽파들의 탄핵을 받아 패륜을 저질렀다는 죄명으로 참수되고, 조정에서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한다. 역사는 이 사건을 진산사건(신해박해, 신해사옥)이라 기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종과 정약전 형제는 천주 교리가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는 등 성리학과의 모순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조정에서 국법으로 천주교를 금하게 되자 천주교를 멀리하게 된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에 심취했던 7~8년의 세월은 노론 벽파의 탄압 빌미가 되어 그의 형제 가족, 친지들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수원화성/창룡문(동문)
수원화성/창룡문(동문) [사진=정성환 기자]
수원 화성 행궁
수원화성 행궁 [사진=정성환 기자]
수원화성 행궁
수원화성 행궁 [사진=정성환 기자]
수원화성 행궁
수원화성 행궁 [사진=정성환 기자]
수원 화성 행궁/유여택
수원 화성 행궁/유여택 [사진=정성환 기자]
화성성역의궤/국립중앙도서관 소장(영인본)/수원 화성박물관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화성성역의궤/국립중앙도서관 소장(영인본)/수원 화성박물관 소재
화성성역의궤/국립중앙도사관 소장(영인본)/수원 화성박물관 소재. 
화성성역의궤는 2007년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진=정성환 기자]
기기도설/거중기 제작에 사용/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복사본)/강진 다산박물관 소재
기기도설/거중기 제작에 사용/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복사본)/강진 다산박물관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거중기(지금의 기중기)/수원 화성박물관 소재
거중기(지금의 기중기)/수원 화성박물관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녹로(지금의 크레인)/돌을 높이 들어 올리는데 사용하던 도구/수원 화성박물관 소재
녹로(지금의 크레인)/돌을 높이 들어 올리는데 사용하던 도구/수원 화성박물관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수원 화성 건설

진산사건 1년 후인 1792년(31세) 정약용은 부친상을 당해 고향 마재로 돌아와 3년 상을 치르고 있었다. 정조는 상중에 있는 정약용에게 화성 축성을 위한 설계와 공사에 필요한 책을 하사하고 계획서를 지어 올리라는 어명을 내린다.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건립된 국가이기에 3년 상을 치르는 중에는 조정의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조가 상중에 있는 신하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정약용에 대한 신임이 각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화성 건설은 새로운 국가의 혁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정조의 정치적 야망이자,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그의 효심이었고 새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가난한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정조의 강한 의지가 담겨있다.

또한, 정조의 화성 행차의 목적은 어머니의 회갑연이었지만, 강력한 왕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군사력을 점검한다는 성격도 내포하고 있었다.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에 보답하기 위해 새로 익힌 신지식을 총동원해 수원 화성 건설 계획에 착수한다.

정조가 보내온 여러 서책 중 정약용의 마음을 사로잡은 책은 스위스 출신의 선교사 ‘테렌즈’가 지은 「기기도설 奇器圖說」이었다.

특히 정약용은 「기기도설」의 많은 도면을 참고하여 ‘도르레’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것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는 ‘거중기’를 발명한다.

1793년 과학적인 화성 설계를 마친 정약용은 1794년부터 10년 계획으로 과학적인 원리를 이용해 화성 건설에 착수했다.

정약용은 6Km나 되는 성곽과 600여 칸의 행궁을 건립하는 큰 공사를 1794년 2월에 시작해 2년 6개월이 지난 1796년 9월 완성한다.

과학적인 기술을 접목해 효율성을 높여 원래 10년이었던 화성 건축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한 것이다.

정약용은 조선의 전통적인 축성법을 바탕으로 서양의 새로운 과학기술의 원리와 그 효율성을 수리로 계산해 우리 현실에 맞게 설계하고 실용화해 수원 화성을 축성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과학기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18세기 건축문화의 대작으로 평가받은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이처럼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대에는 4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18세게 군사 건축물 중 가장 잘 만들었다는 것, 아름답다는 것, 건축과정을 상세히 빠짐없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가 현존한다는 것, 그리고 정조 대왕의 위민정신이 깃들어 있기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라고 한다.

화성에 담긴 위민정신은 “둔전을 설치해 농사짓는 것은 먼 날을 염려한 꾀였다”라고 새겨진 ‘화성기적비’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둔전은 군량을 마련하기 위한 토지로써, 땅 없는 농민들에게 경작권을 주어 풍년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했으며, 이러한 정조의 애민정책은 특권을 누리던 양반 지주층에 대한 경고의 의미이기도 했다.

<3편 개혁 군주 정조의 죽음과 사라져간 정약용의 꿈>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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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지우 2022-08-15 00:24:41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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