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이야기1] 청년 정약용의 성장과 개혁 군주 정조와의 만남
상태바
[정약용 이야기1] 청년 정약용의 성장과 개혁 군주 정조와의 만남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8.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혼이 살아 숨 쉬는 다산초당을 찾아서...6편 연재 중 1편
강진 귀양살이 중 1表2書(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 집필
조선 후기 실학사상 집대성 천재 학자,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인물 선정
다산초당/전라남도 강진군 소재. /정성환 기자
강진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이 18년에 걸친 유배 시절 제자들을 가르치며 10년 동안 기거했던 초당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이 고향 마재로 돌아간 이후 초당이 폐가되자 1958년 다산 유적보존회가 기와집으로 다시 지었다.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37]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조선 시대 천재 실학자로 칭송받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서'로 제1편 청년 정약용의 성장과 개혁 군주 정조와의 만남이다. 이번 1편에 이어 △2편 정약용과 천주교, 12년의 관직 생활 △3편 개혁 군주 정조의 죽음과 사라져간 정약용의 꿈 △4편 강진 유배 생활 18년의 여정 △5편 정약용의 애민정신 1표 2서(一表二書) △6편 18년 만의 귀향, 다음 세상을 기다리며로 매주 월요일 연재된다.

다산 정약용/전시실. /정성환 기자
다산 정약용/전시실. /정성환 기자

 

◆1편 청년 정약용의 성장과 개혁 군주 정조와의 만남

조선 시대 천재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정조의 총애과 신임을 받으며 자신의 정치철학을 펼쳐나간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의 꿈은 좌절되고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해 강진으로 유배되는 아픔을 겪는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을 귀양살이하면서 1表2書(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담아낸다.

역사는 그를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천재 학자로 기록하고, 장자크 루소, 헤르만 헤세와 함께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인물로 선정했다.

◆다산의 유년시절

정약용의 고향은 경기도 광주군 팔당호 기슭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이다.

그의 부친 정재원(1730~1792)은 1762년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나자 벼슬의 길을 포기하고 고향 마재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선 시대 최고의 천재 실학자 정약용이 태어난다.

정약용의 본관은 나주, 호는 삼미자(三眉子)·다산(茶山)·사암(俟菴)·열수(洌水)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정약용의 조상은 8대가 잇달아 옥당(玉堂, 홍문관)에서 벼슬을 지낸 영예로운 가문이었으나 고조부와 조부가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부친에 이르러서야 다시 벼슬에 나가기 시작해 가세는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사이에 약전·약종·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다.

정약용의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은 윤선도(1587~1671) 가문이다.

윤선도는 조선 현종 때 남인의 영수로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예송논쟁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윤선도의 증손자가 자화상(국보 제240호)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이고 그의 손녀딸이 정약용의 어머니이다.

이처럼 정약용은 친가로부터 학자의 기질을, 외가로부터 예술적 가풍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어릴 때 부친에게 글을 배웠고 성격은 매우 차분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네 살에 이미 천자문(千字文)을 읽었고, 일곱 살에 한시를 지을 만큼 총명했다.

그는 일곱 살 때 산(山)이라는 제목의 한시를 지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우니(小山蔽大山소산폐대산),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라네(遠近地不同원근지부동)”라는 한시(漢詩)의 구절을 본 부친은 “분수에 밝으니 성장하면 역법과 산수에 능통할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정약용이 어린 나이임에도 사물의 착시현상과 원근법을 이해할 만큼 그의 관찰력이 풍부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시다.

부친의 이러한 예견은 훗날 배다리 건설과 화성축조 과정에서 정약용의 과학적 수리능력이 현실로 드러난다.

정약용은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 때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던 부친에게서 경전과 역사를 배웠다.

그가 1년 동안 지은 자신의 글을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만들었는데, 이를 본 학자들이 감탄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독서와 작문에 심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삼미(三眉)란 정약용이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은 오른쪽 눈썹에 흉터 자국이 있었는데 눈썹이 세 갈래로 나누어져 삼미(三眉)라 불렸다고 하는데 그의 호 삼미자(三眉子)는 여기에서 연유한다.

정약용은 명문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서 청렴한 목민관이던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고, 실제 어떻게 목민관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직접 보면서 성장하게 된다.

그가 열여섯 살 되던 해 부친이 전라도 화순 현감으로 제수되자, 부친을 따라 화순으로 내려와 형제들과 함께 동복현에 있는 적벽(赤壁)과 물염정(勿染亭)에서 노닐었고 서석산(무등산)을 유람하며 시(詩)를 지었다고 한다.

◆ 개혁 군주 정조와의 만남

정조가 즉위한 해인 1776년(15세) 정약용은 서울에 사는 풍산홍씨 홍화보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부인 홍 씨는 정약용의 든든한 조력자로서 그와 한시(漢詩)를 주고받을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정약용의 서울 생활은 천하의 인걸들 틈에 끼어 시대정신에 동참하는 당당한 청년으로 거듭 성장하며 과거 시험을 준비한다.

정약용은 이가환(1756~1801) 등 당대의 학자들과 어울리며 학문을 논했고, 최초 천주교 세례를 받은 누님의 남편 이승훈(1756~1801)에게 받은 이익의 『성호사설』이라는 책을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당시 이익의 학문은 성리학을 계승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까지 포함한 새로운 문물을 다양하게 수용하는 학풍이었다.

정약용은 “나의 큰 꿈은 성호를 따라 사숙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익의 학풍에 매료되어 성리학과는 다른 실용의 학문에 큰 뜻을 품게 된다.

특히 정약용은 사회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개혁론의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서양과학기술의 우월함을 열린 마음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익의 학풍에 심취했으며, 이것은 훗날 정약용의 실학 이론을 정립하는 토대가 된다.

1783년(22세) 조선의 개혁 군주 정조 즉위 7년째 되던 해에 정약용은 사마시(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 선진유학 등을 연구하며 대과시험을 준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중용(中庸)에 관한 질문을 주고 답을 제출하라고 명했다.

정약용은 답을 지어 올린다. 이것이 <中庸講義 중용강의>이다.

정약용은 ‘사칠이기(四七理氣)의 변(辯)’을 논하면서 개혁적 학풍의 서인 율곡 이이의 기발설(氣發說)을 인용한 답안을 제출한다.

당시 남인은 율곡의 기발설(氣發說)을 부정하고 퇴계 이황의 이발설(理發說)을 수용한 영남학파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남인이었으나 개혁적인 율곡의 학풍을 더 수용한 것이다.

이 답안지는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것이 정조와의 첫 만남이었다.

정조는 개혁을 위해서는 기득권인 남인 노론 세력의 견제가 필요했고, 정약용과 같은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개혁적인 신하가 절실히 필요했다.

조선의 개혁을 꿈꾼 정조와 정약용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정약용의 개혁적인 역사는 그렇게 시작된다.

1789년(28세)대과에 급제해 종7품 ‘희릉직장’으로 조정에 출사한 정약용은 곧바로 규장각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발탁된다.

그의 능력을 믿고 대과시험에 합격하기를 기다렸던 정조의 희망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정약용의 관직 생활은 서른아홉 살 때(1800년) 끝이 나는 12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조의 지극한 총애와 신뢰를 받으며 자신의 철학을 펼쳐나간다.

그는 희정당(熙政堂)에서 초계문신들에게 대학을 강의했는데, 정조 임금은 정약용에게 유교 경전을 깊이 연구해 그 강의 내용을 기록하게 한다.

정약용은 임금의 뜻을 헤아려 열성을 다해 책을 집필한다.

이것이 <희정당 대학강의, 熙政堂大學講義>이다. 이 책을 읽어본 정조는 정약용의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인정하고 크게 성장할 인물이라고 믿었으며, 장차 규장각(奎章閣) 각신(閣臣)으로 키우고자 결심한다.

 

<2편 정약용과 천주교, 12년의 관직 생활 >으로 계속...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