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꿈꿨던 미완의 개혁가...'정암 조광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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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꿈꿨던 미완의 개혁가...'정암 조광조'[2]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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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 기묘사화로 유배, 38세 젊은 나이에 생 마감
미완의 개혁가 조광조의 한(恨)이 서린 '죽수서원' 그리고 '기묘사화'...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34] 정성환 전문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조선시대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꿈꾸며, 개혁을 추진했던 미완의 개혁가 '정암 조광조' 선생을 찾아서 2편이다. 1편은 조광조 선생의 유배지를 살펴봤고, 2편에선 중종의 배신과 '기묘사화' 그리고 미완의 개혁가 조광조의 한(恨)이 서린 '죽수서원' 편이다.

 

죽수서원(竹樹書院)/전남 화순군 한천면 학포로 소재/전남 문화재 자료 제130호. /정성환 기자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학포로 산자락에 정암 조광조와 학포 양팽손을 배향하는 죽수서원이 세워져 있다.

죽수서원은 정암 선생이 1519년(중종14) 사사된 후 학포 양팽손이 정암의 시신을 화순군 이양면에 있는 중조산에 암장하고 사당을 지어 배향하다가 1570년(선조3) 조정의 명에 의해 사당을 지금의 위치에 옮겨 건립하고 이를 승격시켜 죽수서원의 사액을 받아 향사했다.

1868년(고종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폐되었다가 1971년 능주 유림과 제주 양씨 후손들이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다. 이후 1983년 한양조씨 후손들이 다시 화순군 한천면 학포로(모산리) 현재의 위치에 복원했다고 한다.

죽수서원(竹樹書院) 입구 홍살문/화순군 한천면 학포로 소재. /정성환 기자
죽수서원(竹樹書院) 입구 홍살문/화순군 한천면 학포로 소재. /정성환 기자
천일사/정암 선생의 사당/죽수서원 내. /정성환 기자
천일사/정암 선생의 사당/죽수서원 내. /정성환 기자
대원군 때 서원이 철폐되고 그 자리에 세운 비/ 죽수서원 내. /정성환 기자
대원군 때 서원이 철폐되고 그 자리에 세운 비/ 죽수서원 내. /정성환 기자

16세기 초 당시 조선 사회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이 등극한 시기였다.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반정 공신 세력들은 권력을 이용해 많은 토지와 부를 축적했으며, 백성들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심각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조광조는 훈구파 세력의 기득권을 없애고 그들의 물적 기반 확대를 저지해 백성들이 골고루 잘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개혁작업을 펼쳐나간다.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서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나누어주는 균전법(均田法)과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해 땅이 특정인에게 편향되지 않도록 하는 한전제(限田制)를 시행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개혁안은 그가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것으로써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훈구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한다.

1519년(중종 14)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사간원 정언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을 맡으면서 자신이 추진할 개혁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고 훈구파 공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 위한 개혁을 추진한다.

그것은 바로 중종반정에 참여한 정국공신 117명의 공훈에 대한 위훈삭제(偉勳削除) 상소였다.

위훈삭제 문제는 사림파와 훈구파 간의 목숨을 건 승부였다. 중종반정의 정국공신 중 실제로 공이 없으면서 거짓으로 서훈을 받은 공신들이 많아 많은 국고가 낭비되어 국가 경제에 많은 위기를 초래했다. 그는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위훈삭제를 통해 거짓으로 등록된 공신들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해 국고로 환수하는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반정 공신들은 튼튼한 기반을 갖춘 훈구세력으로 성장했고, 중종 역시 반정으로 추대된 왕이었기에 정통성의 문제가 확대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조광조의 사림파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반정 공신들이 자신들의 자식이나 친인척들을 거짓으로 공적을 꾸며 국고를 탕진했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났기에 중종은 ‘위훈삭제’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1519년 중종의 윤허를 받은 조광조는 117여 명의 정국공신 중 78여 명에 이르는 가짜 공신들의 위훈을 삭제하고 토지와 노비를 국고로 환수함으로써 정치적 승리를 거두게 되지만, 이후 이 개혁은 중종과 훈구세력의 반발을 사 친위 쿠데타인 기묘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시 ‘위훈삭제’로 정국공신들이 관직에서 대거 탈락하면서 조광조는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중종도 처음에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균형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중종이 조광조를 신임할수록 사림의 권력은 강대해졌고, 왕의 권한은 약화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궁 안에는 온 나라의 인심이 조광조에게 돌아갔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조광조의 개혁은 거침이 없었다. 이것은 조광조의 개혁정책이 중종과 백성의 지지를 받으면서 조광조의 권력이 왕권보다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광조의 개혁이 성공하려면 왕이 성인(聖人)이 되어 왕도정치를 펼쳐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중종은 왕의 수업을 받지 못하고 반정으로 추대된 왕이었으므로 왕도정치를 펼치기 위해서는 경연(經筵)을 통해 신하들의 교육을 받고 끊임없는 수양(修養)을 통해 왕 스스로 성인(聖人)이 되기를 조광조는 진심으로 원했다.

중종이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개혁을 완수할 수 있고, 개혁이 완성되어야 그가 꿈꾸었던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조광조는 굳게 믿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조광조의 신진 사림파는 중종에게 강도 높은 경연을 강요했고, 사림파의 강도 높은 경연의 태도는 왕의 권위를 능가하기에 이른다.

중종은 왕권을 능가하는 사림들의 도발에 대해 두려움과 분노에 불안했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의 개혁정책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고, 그 의구심은 조광조와의 정치적 동반관계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중종은 개혁보다는 왕권을 지키기 위해 조광조 일파를 제거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태종 이방원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도전을 제거하고,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육신을 희생시켰듯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도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었다고 볼 수 있다.

1519년 (중종 14년) 중종의 파격적인 신임을 받은 조광조의 ‘위훈삭제’라는 개혁정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훈구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반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그들의 세력을 꺾으려는 중종의 마음을 알아차린 홍경주, 남곤, 심정 등 훈구파들은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게 된다.

이 음모는 훈구파 홍경주가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 씨와 자신의 딸 희빈 홍 씨 등을 사주하여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나뭇잎에 꿀을 발라 쓴 뒤, 벌레가 갉아 먹어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가 쓰인 나뭇잎을 중종에게 보여준 사건으로 조광조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나뭇잎에 새겨진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는, 주(走)와 조(肖)의 글씨를 합하면 조(趙)가 된다는 뜻으로, 이것은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엄청난 역모 사건이었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쓰인 나뭇잎, 이 사건은 훈구파의 모략이 얼마나 치밀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며, 중종이 조광조 일파를 제거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렵 중종은 조광조 일파의 ‘위훈삭제’ 사건을 보면서 ‘중종반정’을 반역으로 몰아가 왕의 정통성을 저해하려는 것으로 단정 짓고 사림파를 정계에서 축출하려는 명분을 찾고 있었다.

1519년 11월 15일 밤 중종은 밀지를 내려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를 비밀리에 궁궐로 불러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너무 과하다며 조광조를 제거하려는 마음을 신하들에게 내비친다.
이것은 ‘위훈삭제’가 단행된 지 불과 사흘 만에 중종의 태도가 돌변한 것으로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겠다는 중종의 단호한 의지였다고 볼 수 있다.

중종의 뜻을 알아차린 훈구파들은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문란케 한다”라는 탄핵 상소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조광조와 신진 사림은 일촉즉발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중종은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조광조와 함께 이루고자 했던 도덕 정치를 포기하고 훈구세력을 등에 업고 사헌부 대사헌 조광조, 형조판서 김정, 대사성 김식, 부제학 김구 등 사림파를 체포하라는 어명을 내리게 된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혼란에 빠진 조선을 개혁해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조광조의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중종의 행위는 조선왕조 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라는 밀명이나 다름없었으며 조광조를 죽이려는 마음이 확고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날 새벽 영문도 모른 채 의금부에 끌려가 투옥된 상황에서도 조광조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중종의 신임을 철저히 믿었다고 한다.

옥에 갇힌 조광조는 유배형이 내려지자 왕을 만나 마지막 소명을 청원했으나 중종은 끝내 만나주지 않았고, 성균관 유생 1000여 명이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의 죄명은 붕당 죄였다. <명종실록>에는 “조광조와 그의 일파가 서로 붕당을 맺어 권력을 차지하고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위를 속이고 사사롭게 행동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종실록>에는 “신의 나이 38세입니다.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입니다. 국가의 병통이 이(利)에 근원에 있는 줄로 망령되게 생각하여 국맥(國脈)을 무궁한 터전에 새롭게 하고자 했을 뿐이고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라는 조광조의 억울함이 기록돼 있으며, 김구·김정·김식 등도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당시 중종은 조광조를 처형해야 후환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뿐, 조광조에 대한 의리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중종에게 조광조는 왕권을 위협한 역적일 뿐이었다.

조광조를 비롯해 조선의 개혁을 꿈꿨던 신진 사림 김정·기준·김식 등은 유배되어 사사되고, 김구 등 수십 명은 유배형에 처해 졌으며 김안국·김정국 등은 파직되었다.

역사는 이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로,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기록했다.

조광조의 죽음과 사림파의 몰락으로 개혁은 실패했고, 현량과는 폐지되고 ‘소격서’는 부활 되었으며, 위훈 삭제된 공신들은 빼앗겼던 공훈(功勳)과 전답, 노비 등을 모두 되찾게 되고 민심은 도탄에 빠져 중종의 치세는 나락으로 떨어져 나간다.

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화순군 능주면 정암길 소재. /정성환 기자
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화순군 능주면 정암길 소재. /정성환 기자
조광조 선생이 유배 와서 살던 초가집/화순군 능주면 정암길 소재. /정성환 기자
조광조 선생이 유배 와서 살던 초가집/화순군 능주면 정암길 소재. /정성환 기자
조광조와 양팽손의 담소 나누는 장면. /정성환 기자
조광조와 양팽손의 담소 나누는 장면. /정성환 기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각/유배지 내. /정성환 기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각/유배지 내. /정성환 기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유배지 내/전남 문화재 기념물 제41호. /정성환 기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유배지 내/전남 문화재 기념물 제41호. /정성환 기자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정암길에는 조광조가 분당을 만들어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어 머물렀던 ‘적려유허지’가 보존되어있고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는 1667년(헌종 8) 조광조 사후 149년 만에 세워진 것으로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능주 목사 민여로가 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기묘년 11월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모의하여 ‘주초위왕’이 왕이 된다는 무근지설을 조작하고 변을 일으켜 다음 달 12월 20일 돌아가시었으며, 능주 목사 ‘민여로’가 세월이 오래되면 그 유허를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비를 세우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조광조는 유배 생활 중에도 늘 북쪽으로 나 있는 문을 열어놓고 항상 한양의 중종임금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사립문을 열어놓고 왕의 부름을 기다렸다고 한다.

1519년 12월 16일 유배 당시 의금부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조광조는 임금의 오해가 풀려서 석방해주러 온줄 알고 맨발로 뛰어나갔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죽는 순간까지 중종에 대한 신임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기다렸던 중종 손길은 사약을 받으라는 금부도사의 어명이었고 이에 모든 것을 체념한 조광조는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큰절 3번을 올린 뒤 절명시(絶命詩) 한 수를 남기고 유배 온 지 한 달만인 1520년 1월 10일 사약을 받아 38세에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그의 시신은 화순에 은거하고 있던 양팽손에 의해 수습되어 화순 쌍봉사 근처에 가묘를 쓰고 초가삼간에 추모당을 지어 배향하게 된다.

양팽손은 조광조와 과거시험을 함께 치렀던 동기로서 사간원 정언 벼슬을 하다가 기묘사화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화순에 은거 중에 능주로 유배된 조광조의 아픔을 함께 나눈 하늘이 맺어준 친구였다.

◆조광조의 죽음 뒤에 전해진 일화들

조광조는 사약을 받자 좀 기다려달라고 금부도사에게 청한 뒤, 창밖을 내다보며 사약을 취소한다는 임금의 교지를 기다리다 금부도사의 독촉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약 한 그릇을 마셨는데 죽지 않자, 그는 군자답게 고요하고 차분하게 ‘내가 죽지 않았으니 한 그릇 더 주시라’ 청하여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중종실록>은 조광조가 금부도사에게 조정의 일을 묻고 나서 자신이 살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아라. 먼 길을 떠나기가 어렵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는 1515년(중종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종6품 사간원 정언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1518년(중종 13년) 종2품 사헌부 대사헌을 지낼 때까지 중종의 총애를 받아 파격적인 승진을 하며 연산군의 폭정으로 무너진 조선 사회를 도학 정치의 이상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불꽃 같은 열정으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중종의 친위 쿠데타에 의해 그의 꿈은 좌절되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시대를 앞서간 조선 시대 미완의 개혁가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는 도(道)는 천성(天性)을 따르는 것이라 했다.

도(道)는 항상 자신의 마음속을 환히 비치게 하는 것이기에 그 빛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성리학자였다. 그는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져 사림파 계보를 형성했으며 도학 사상의 이상을 현실정치에 구현한 개혁적인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율곡 이이는 조광조가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을 추구하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이 경계해야 할 점이라고 평가하면서 김굉필·정여창·이언적 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추앙했다.

그는 후대의 평가처럼 이상주의와 급진성, 지지 기반이 없어 그의 개혁은 당대에 실패했으나 모든 백성이 고르게 잘 사는 사회, 이상적 도덕 정치를 꿈꾸며 그가 남겼던 개혁의 정신은 선조 이후 다시금 정계에 진출한 사림세력의 정신적 토양이 되어 조선 후기의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처럼 조광조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했던 개혁가로서 붕당과 정파를 초월하여 후대 사림들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다.

한때는 개혁의 동반자로서 연산군 대의 폐정을 개혁하고 유교적 이상 정치와 도덕 정치를 실현하려 했던 조광조의 최후는 이처럼 비참했다.

유교적 이상 정치와 도덕 정치를 꿈꿨던 미완의 개혁가 조광조는 죽음을 앞두고도 중종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고 지은 절명시(絶命詩)가 전해져,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그토록 가혹했던 중종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인종 때 신원 되고 선조 초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 많은 서원과 사당이 전국에 세워졌으며 능주의 죽수서원, 희천의 양현사, 용인의 심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절명시(絶命詩) 편액/애우당/화순 능주 유배지 소재. /정성환 기자
절명시(絶命詩) 편액/애우당/화순 능주 유배지 소재. /정성환 기자

절명시(絶命詩)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白日臨下土(백일임하토)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昭昭照丹衷(소소조단충)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
-정암(靜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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