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청년들의 혼(魂)과 예술문화 고스란한...'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이야기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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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청년들의 혼(魂)과 예술문화 고스란한...'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이야기 [1편]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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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문화역사가 어우러진 광주의 명소
광주의 예루살렘’ 또는 ‘서양촌’ 명명
오웬기념각, 이장우·최승효 가옥, 정율성의 생가, 펭귄마을 등 다채
정율성로, 그의 예술성과 애국심을 기리기 위한 거리명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29] 정성환 전문기자 = 이번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울분과 좌절 속에 한 줄기 희망을 찾고자 몸부림쳤던 광주 청년들의 혼(魂)과 예술문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첫번째 이야기다. 이 곳엔 오웬기념각, 이장우·최승효 가옥, 정율성 생가, 조아라 기념관, 팽귄마을 등이 양림동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어 과거의 역사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다.

양림 역사문화 마을(양림마을이야기관)/광주광역시 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양림 역사문화 마을(양림마을이야기관)/광주광역시 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양림동의 역사

120여 년 전 광주의 근·현대사는 일제강점기의 울분과 좌절 속에 한 줄기 희망을 찾고자 몸부림쳤던 광주 청년들의 혼(魂)과 예술문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양림동 역사에서 시작된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은 사직산과 양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자리 잡은 광주 시민의 보금자리로, 해발 108m의 양림산은 원래 대나무 숲으로 유명했던 조그마한 야산이었다고 한다.

양림(楊林)이란 마을의 유래는 ‘버드나무 숲으로 덮여 있는 곳’이라 하여 양촌(陽村)과 유림(柳林)을 합쳐 양림(楊林)으로 불렸다.

양림동은 근·현대사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곳으로 1904년경 유진벨(배유지), 오웬(오원) 등 서양 선교사들이 양림동에 정착하면서 교회당과 수피아여학교 및 제중병원(현, 기독병원)을 세우고 신식교육과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신문명의 출발지가 되었으며 ‘광주의 예루살렘’ 또는 ‘서양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 양림마을 이야기 관

양림마을 이야기 관은 양림동 관광 안내와 함께 역사와 인물 등 주요관광자원을 전시·홍보하는 곳이다.

1894년 호남의 농민들이 중심이 된 동학혁명의 꿈은 일본과 청국의 개입으로 처참히 무너진다.

조선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청·일 전쟁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일본이 차지하게 되는 대전환점이 되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청의 속국에서 벗어나지만,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받게 되는 혹독한 시련의 시작점이 된다.

1904년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미국·영국 등 강대국이 일본제국에 한국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 무렵인 1904년, 미국의 선교사들은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양림동에 들어와 교회를 건립하고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고, 병원을 세워 병자를 치료하고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양림동의 역사는 시작된다.

선교사들의 사랑과 헌신은 오웬기념각을 중심으로 우일선(윌슨) 선교사 사택 등 근대식 서양 건축물과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린 아픈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다 순교한 850여 명의 선교사의 묘역, 수령 400여 년이 된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등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어우러져 역사의 흔적을 얘기한다.

또한, 조선 시대 정엄(鄭淹,1528~1580)의 효행을 기린 정려(旌閭)와 충견상, 광주광역시 문화재로 지정된 이장우·최승효 가옥, 일제강점기의 흔적 3·1만세 운동길과 뒹굴 동굴, 정율성의 생가와 정율성의 거리,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기념관, 한센병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 기념관, 지나온 세월을 간직한 ‘팽귄마을’ 등이 양림동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어 과거의 역사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다.

정엄 선생 효자비와 충견상 [사진=정성환 기자]
정엄 선생 효자비와 충견상 [사진=정성환 기자]

△ 효자광주정공엄지려(孝子光州鄭公淹之閭) 비각

양촌 정엄(楊村 鄭淹,1528~1580)은 광주 양림동 출신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선조 때 나주 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모친이 병환 중일 때 손수 죽을 끓이고 약을 달이며 정성을 다했지만 결국 운명하게 되자 장례 절차를 성대히 하여 효를 행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모친상의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시묘살이를 하던 중 지쳐 쓰러져 이듬해 모친의 묘 옆에서 자신도 생을 마감하게 된다.

1611년 광해군 때 정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정려(旌閭)’가 하사되고 정려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75년 후손들이 정려각을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인 석조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정공엄지려(鄭公淹之閭)비각 옆에는 정엄의 심부름을 했다고 전해진 충견(忠犬)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주인 정엄(鄭淹)의 문서수발을 위해 한양을 오가며 심부름하다 죽은 충견(忠犬) 이야기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조선 시대 중종 때 전라감사 정엄(鄭淹)은 통신 업무에 영리한 토종개를 이용했는데 어찌나 영리한지 한양까지 문서수발을 척척 해내 당시 말이나 사람, 새를 통해 전하는 것보다 훨씬 빨라 막대한 통신비를 절약했다고 한다.

특히 충견(忠犬)이 광주에 살던 ‘정엄’과 관찰사로 평양에 있던 그이 부친 ‘정만종’ 사이를 오가며 서신을 전달할 때는 편지를 담은 지대와 함께 목에 엽전을 넣은 전대를 달고 다녔는데, 배고플 때는 주막에 들러 밥을 사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주막 주인이 밥값 이상의 돈을 전대에서 꺼내면 즉시 알아차리고 으르렁거릴 정도로 영특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놀랄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주와 한양·평양을 오가며 양촌의 손발이 되었던 이 충견은 한양에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던 중 전주의 강가 다리 밑에서 아홉 마리의 새끼를 낳고 주인이 살고 있던 이곳까지 새끼를 모두 옮긴 후 그만 탈진해 집 앞 길가에서 지쳐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정엄(鄭淹)은 자신의 잘못으로 개가 죽었다고 크게 자책하며 석공에게 개의 상을 조각하게 해 집 뜰에 세우고 추모했는데, 정엄(鄭淹)이 타계한 뒤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하사되고 ‘효자비’가 세워질 무렵 ‘충견상’도 함께 세웠다고 전한다.

정율성 거리전시관/광주 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정율성 거리전시관/광주 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정율성 동상/광주 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정율성 동상/광주 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정율성 생가 (정율성로 16-7)/광주 양림동 소재 정율성 선생 탄생지/광주광역시 불로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정율성 생가 (정율성로 16-7)/광주 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정율성 선생 탄생지/광주광역시 불로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정율성 선생 탄생지/광주광역시 불로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정율성 거리전시관

정율성 선생과 관련된 각종 사진과 영상자료를 모아 조성한 거리전시관이다.

정율성(1918~1976)은 광주 출신으로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던 부친 정해업의 5남 3녀중 5남으로 태어나 숭일학교와 전주 신흥중학교를 다녔다.

정율성의 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자였고 그의 누나는 수피아여학교 음악 교사였으며 광주의 민족운동가인 최흥종 목사가 큰 외삼촌이다. 이러한 가족 환경 속에서 성장한 정율성은 누나의 영향을 받아 동서양의 음악을 접하고 최고의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형제들을 통해 항일운동과 독립정신의 의지를 굳건히 키워나가게 된다.

1933년 19세 되던 해 정율성은 중국 난징으로 건너가 김원봉이 이끌던 항일투쟁 간부 양성소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민족혁명당 당무를 보면서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음악공부를 하고 조선의용대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이때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교장이던 김원봉이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으로 율성(律成)이란 이름을 지어 줬다고 한다.

1936년 그는 첫 작품 ‘5월의 노래(五月之歌)’를 작곡했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흡수되자 정율성은 김원봉과 결별하고 난징을 떠나 중국공산당 혁명근거지인 옌안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옌안에서 중국 공산군의 팔로군과 함께 항일투쟁을 하던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여 사회주의 독립투사 ‘윤세주’가 이끄는 태항산 전투에 참전하고 정율성은 그곳에서 <팔로군행진곡>과 <옌안송> 등 360여 곡을 작곡하며 중국의 3대 음악가로 추앙받게 된다.

해방 후 조선의용군은 북한 인민군에 흡수되고 정율성도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 인민군 활동하며 인민군 군가인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한다.

1951년 중국으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하던 중 1956년 연안파가 숙청되자 중국 국적을 얻어 정착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긴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그리 평온치 않았다.

1966부터 10년간 벌어진 중국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전근대적인 문화활동이 중단되고 중국의 애국가와 같은 ‘팔로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조차도 공연과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고 홍위병의 협박과 압수수색으로 많은 악보 등이 유실되는 등 시련을 겪으며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가는 1976년 정율성은 조카 손녀를 데리고 베이징 근교 강가를 산책하다 뇌일혈로 쓰러져 6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현재 그는 중국의 국립묘지인 북경의 팔보산(八寶山) 혁명 묘역에 안장돼 있고, 그가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이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정식 지정되면서 작곡자로서의 명성을 되찾게 된다.

200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 기념으로 선정된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태항산이 있는 한단시에는 조선의용군 기념관과 함께 정율성 기념관이 세워져 그의 음악성과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양림동에는 그의 발자취가 숨 쉬고 있다.

정율성로 입구에 정율성 동상이 서 있으며, 「옌안송」의 음계를 표현한 거리 음반과 정율성 음악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정율성 거리전시관이 있다.

정율성 키오스크(인물에 대한 연대기와 각종 문서, 음악재생 등을 할 수 있는 미디어 전시관)는 음악가 정율성의 일대기와 양림동 100여 년의 역사가 함께 어우러져 특별함이 더해진다.

특히 정율성 거리는 광주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요우커)들이 꼭 방문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정율성은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조국애와 열정적인 예술혼으로 동아시아 현대음악의 최고 반열에 오른 광주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광주광역시는 양림동 휴먼시아 아파트와 정율성 선생 생가가 있는 구간의  ‘정율성로’는 그의 예술성과 독립에 대한 애국심을 기리기 위한 거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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