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월파 유팽로'의 절의 정신 깃든 '도산사'를 찾아서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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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월파 유팽로'의 절의 정신 깃든 '도산사'를 찾아서 [1편]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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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초 의병장이자 최초 승전사 주인공
호남 연합의병 구심점 임진왜란 승리의 초석
금산전투서 고경명 장군 등과 39세 나이로 순절
의(義)로운 의병장이자 애국적 지성인으로 역사 기록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27] 정성환 전문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임진왜란 전국 최초의 의병을 일으킨 월파 유팽로 장군의 절의 정신이 깃든 ‘도산사’를 찾아서다. 이번 편은 2편 중 1편인 '임진왜란과 최초의병장 월파 유팽로' 이야기다.

◆ 월파 유팽로(月波 柳彭老, 1554~1592)

도산사/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도산사/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도산사(道山祠)는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에 있는 월파(月坡) 유팽로(柳彭老) 선생을 배향하는 사우로 2002년 건립하여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 제1편 임진왜란과 최초 의병장 월파 유팽로

임진왜란은 7년간 한국, 중국, 일본 3국이 참여한 국제전쟁으로 그 전쟁의 규모가 크고 전쟁 기간이 길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대전쟁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유팽로(1554~1592)는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하고 국방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고, 왜군이 침입하자 곧바로 고향인 곡성 옥과로 내려와 수백 명의 의병을 결성한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이었다.

그는 1592년 5월 29일 담양 추성관에서 동래부사를 역임한 고경명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여 전라도 연합의병을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592년 7월 10일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좌절시킨 금산전투에서 39세의 젊은 나이로 순절한 애국적 지성인이었다.

15~16세기 일본은 유럽 상인의 진출로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하면서 봉건적 지배체제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싱가포르에서 수입한 신무기 조총을 사용하여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전국시대의 혼란을 평정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봉건적 지배권을 강화했다.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영주(다이묘)들의 힘을 없앨 필요가 있었고 또한 부하에게 나눠줄 토지가 필요했다.

일본은 1510년 삼포왜란 후 조선과의 무역량이 절반으로 줄었고, 중국은 왜구의 노략질에 중국 해안을 봉쇄해 해금 정책을 폈다.

일본은 조선에 정규무역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중국과의 무역이 단절되자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영주들을 견제하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조선을 발판삼아 중국과 인도까지 정벌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는 조선에 승려와 상인을 가장한 스파이를 보내 조선에 대한 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조선의 지리와 군사현황 등 모든 것을 파악하고 30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조선을 침략할 발판을 마련한다.

16세기 조선 초기에는 일본에 60여 회의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의 정보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연산군~선조 대에 이르러 약 5회 정도의 사신을 파견하였기에 일본 정세에 대해 몰랐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200년 동안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에 온 나라의 백성이 편안함에 익숙해져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다는 소문이 무성해지자 조선 조성에서는 일본의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동인 김성일과 서인 황윤길을 파견하지만 동인 김성일은 전쟁의 징후가 없다고 하고 서인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이 침략할 것이란 상반된 보고를 한다.

그러나 조정은 전쟁 가능성에 회의적이었고 일본에 대한 과소평가, 무사안일한 관료들의 태도로 인해 전쟁 준비는 효과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부산 왜관에 머무르던 일본인이 본국으로 철수하자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알아차린 조선은 광주 관찰사 권율, 진주 관찰사 김시민, 전라 좌수사 이순신, 경상도 우수사 원균을 새로 임명하여 무기를 정비하고 성을 보수하여 증축하면서 왜란에 대비했지만, 백성들의 불만과 비협조로 성과는 미비했다.

다만, 이순신 장군만이 전비를 갖추고 거북선을 만들어 전쟁에 대비했다.

조선의 국방체제도 진관체제 대신 제승방략체제를 채택해 적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취약했고 방군수포제가 성행하여 병역을 면제받은 백성이 늘어나면서 군사동원체제가 어려워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있었다.

1592년 4월 13일 18만의 일본 대군이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7년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풍부한 실전경험과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정발 장군의 부산진, 윤흥신 장군의 다대포, 김상현 부사의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마저 무너뜨리고 한성으로 향했다.

위기에 몰린 조정 대신들과 선조는 각도에 근왕(勤王) 할 것을 명하고 한성과 백성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어명을 받은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졸속으로 동원된 관군 8천여 명의 근왕병을 이끌고 근왕을 위해 북상했으나 공주에 이르러서 한성이 함락되고 선조임금이 도망갔다는 소식에 사기가 꺾인 관군은 스스로 흐트러져 군율이 서지 않았고 불만이 고조되었다. 관군의 통제가 어려워지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출정을 포기한 채 군대를 해산하고 광주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이광의 비겁한 행동은 백성의 비난과 질책을 받았고 마음이 다급했던 선조임금은 경상·전라도의 관군을 동원하여 급히 구원병을 보내 한성을 탈환하라는 교지를 재차 내리게 된다.

이미 각 읍 백성들에게 비겁자라 낙인 찍힌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2차 근왕병을 모집해 출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 백성들은 믿을 수 없는 관군에 지원하기보다는 의병에 지원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광은 가혹한 징발과 수색을 통해 가까스로 근왕군을 모집하게 된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 경상도 관찰사 김수,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 등은 3도에서 8만여 명이라는 대규모의 남도 근왕군을 편성하여 한성을 탈환하기 위해 출정하게 된다.

그러나 근왕군의 대부분은 농사짓는 농부이거나 유생, 피난 중인 일반 백성들로서 전투 능력도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군은 평양을 향해 북진했고 일본 장수 와키자카 휘하의 군사 1,600여 명은 서울과 수원 등지에서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주둔하고 있었다.

오산 독산성에 도착한 이광의 남도 근왕군은 수원과 용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격퇴하고 한양 탈환에 나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광주 목사 권율은 한성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적은 수의 일본군을 피해 신속히 북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광주 관찰사 이광은 광주 목사 권율의 조언을 듣지 않고 일본군을 섬멸해 나가면서 북상할 것을 고집했다.

8만여 명의 조선의 대군에게 공격받은 일본군은 후퇴하면서 한양에 있는 본대에 지원을 요청했고 와키자카의 본대가 용인에 도착해 협공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광의 군대는 용인 광교산에서 척후병도 세우지 않는 무방비 상태에서 아침을 지어 먹다가 1,600여 명의 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어이없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 전투의 패인은 통일적 지휘체계의 미비, 장수들의 무능과 지휘능력 부족, 오합지졸의 근왕군 편성 등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이 임진왜란 최악의 패전으로 역사에 기록된 ‘용인전투’이다.

이렇게 8만여 명의 근왕군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한성 탈환의 꿈은 좌절되고 조선의 군민(軍民)은 실의에 빠지게 된다.

오직 광주 목사 권율만이 휘하 장병을 온전히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이후 호남을 지키기 위한 이치 전투에서 대승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용인전투 패배 후 전라고 관찰사 이광은 파직되고 권율이 전라도 관찰사가 된다.

“전장에 내보낼 만한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징비록」 中-
“새처럼 숨고 짐승처럼 엎드려 (관군에) 응모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선조실록」 中-

용인전투 패배 이후 백성들은 관군을 믿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불신은 백성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 가족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의병이란 용어는 삼국사기에 한 번, 고려사에 5번 나오는데 이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 배경은 성리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은 충과 효, 선비의 의리를 중요시하는 도덕 중심의 학문으로 전직 관료 출신의 유학자가 의병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의병’이란 외적의 침입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민중이 자발적으로 군대를 모아 군량과 무기 등을 스스로 마련해 싸운 병사를 말한다.

‘근왕의병’이란 호남지방의 유팽로·고경명·김천일 등 양반 관료들이 주도한 의병으로서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 봉기한 의병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의병은 국가가 의병장으로 인정하고 관직을 부여하고 지방 수령들이 경제적 지원을 했기 때문에 의병의 성격보다 관군의 성격이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능을 상실한 관군을 대신해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서 민심을 수습하고 후방을 안정시킨 주역들이 바로 유팽로·고경명과 같은 관료 출신의 의병장들이었다

임진왜란 극복의 주역은 호남이었다.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권율의 이치전투·행주대첩, 황진의 웅치전투 승리의 주역은 전라도의 백성이었고 관군과 경상도 의병이 출정을 포기했던 제2차 진주성 혈전은 전라도를 지키기 위한 김천일, 황진, 최경회, 고종후 등 호남 의병의 순절이었다. 또한 물자와 군량미 보급, 국가의 재정, 경상도 백성에게 구휼미를 조달한 곳도 호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임진왜란 극복에 있어서 전라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임진왜란 5년 동안 호남이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을 것이다”라 했다.

특히 제1차 금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유팽로, 안영, 고인후 등 호남 연합의병의 순절은 전국적인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고 그 중심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월파 유팽로가 있었다.

월파 유팽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임실 갈담역 전투(1572. 5.11)에서 왜군을 격파한 임진왜란 최초 승전사의 주인공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제봉 고경명과 함께 7천여 명의 호남 의병을 결성하여 금산전투에서 호남을 지키기 위해 순절한 의(義)로운 의병장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전경 [사진=정성환 기자]
도산사 입구 [사진=정성환 기자]
도산사 입구 [사진=정성환 기자]
도산사 전경 [사진=정성환 기자]
도산사 전경 [사진=정성환 기자]
6세에 지었다는 시비/도산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6세에 지었다는 시비/도산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월파 유팽로는 1552년(명종 9)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으로서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합강(合江)마을에서 부친 류경안과 모친 남원윤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월파(月坡)이다.

조선 개국공신 유만수의 후손으로 부친 유경안은 사마시에 합격한 후 진원 군수와 충주 판관을 역임했으나 을사사화가 일어날 즈음 옥과 합강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아들 유팽로를 가르쳤다고 한다.

6세에 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한 그는 1579년(26세) 진사시에 합격했고, 1588년(선조 21, 34세) 식년시 문과에 좋은 성적으로 급제했다.

그는 광주에 살던 고경명의 둘째 아들 인후와 함께 같은 진사시에 합격했다고 한다. 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은 동녀우(同年友)라고 해서 특별한 친밀감을 가지게 되는데 유팽로는 인후와 그의 아버지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문과에 급제한 유팽로는 관직에 등용된 직후 부친상을 당해 귀향한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4월 홍문관 박사(정 7품)에 발탁되어 조정에 출사하게 된다.

그는 출사하자마자 관료들의 무사안일과 권력층의 비리뿐만 아니라 왕의 잘못까지 거침없이 비판한 상소를 올리게 되고 그 상소 때문에 그를 미워하는 자들에 의해 강한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우계 성혼과 송강 정철 등의 변호로 삭탈관직은 면하고 종9품 성균관학유로 좌천되어 유임될 수 있었다고 한다.

유팽로의 상소는 왜란이 임박했음을 경고하고 이에 대비하여 권농을 통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비를 확충하여 불의에 대응하여 군주와 수령들이 백성의 살림살이를 잘 보살펴야 외침을 막아낼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피를 토한 심정으로 거국적인 방략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국가를 위해 충과 효, 의리를 다한 월파 유팽로의 학문적 성격은 「유가설儒家說」, 「병가설兵家說」, 「농가설農家說」에 잘 나타나 있다.

「유가설」은 중국의 역대 유학자를 논평한 것으로 그의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가장 존경했던 유학자는 ‘제갈량’과 ‘도연명’이라고 전한다.

‘제갈량’의 경우 사심이 없는 우국충정과 지행知行을, ‘도연명’의 경우 세상일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운 태도를 강조한 것으로 유팽로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병가설」에서는 유학자는 문文만이라 무武를 겸비해야 하고 군사문제, 무기문제, 지형지물의 이용, 첩보활동의 중요성 등을 다루고 있으며, 「농가설」에서는 농법을 연구해 백성이 잘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농사짓는 중요한 점을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특히 「병가설」에서 자주국방을 위한 군비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왜적의 침략이 임박했음을 경고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전쟁에 대응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수년 전부터 율곡 이이, 남명 조식 등 현명한 선비들은 전쟁의 조짐을 예견하고 방책을 세울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팽로 역시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조정에 출사함과 동시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점과 수년 전부터 전란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유팽로의 고향인 옥과면 합강리 뒤편에 있는 옥출산은 백제 때부터 산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유팽로는 임진왜란 3년 전부터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이곳 ‘옥출산성’에 3칸의 집을 지어 무기, 군복, 곡식을 비축해 왜란에 대비했다고 전하며 유팽로가 일찍이 일본의 침략을 예견했던 사실은 월파집에 수록된 상소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여 국가의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간다.” 「월파집」 임진년 상소-
“이제 왜놈이 우리에게 실을 빌려 명나라를 범하려 하매…, 군사는 하나의 무기도 쓸만한 것이 없으니 … 「월파집」 임진년 상소 中-
”남쪽에 난리가 일어날 것을 알고 미리 방비를 갖춰야 한다고 했으나 여러 소인배에게 거슬려 성균관학유로 쫓겨나게 되었다. 「월파집」 中-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유팽로의 상소를 보고 비웃으며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조정의 위정자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백성을 버리고 선조임금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이러한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유팽로는 관군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왜군을 격퇴하는 방법은 오로지 의병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고 의병을 모으기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당시 조선은 전란에 대한 대비가 거의 없었고 임진왜란 발발 보름 만에 선조가 도성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자 민심은 겉잡을 수없이 흉흉해졌다. 노비들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성난 백성들도 가세해 경복궁을 비롯한 창덕궁과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렸다.
나라가 곧 망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무정부 상태에 이르자 백성들은 도적이 되기도 하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마을 돌담길 벽화/옥과면 합강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마을 돌담길 벽화/옥과면 합강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마을 돌담길 벽화/옥과면 합강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유팽로 전시관/도산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유팽로 전시관/도산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1592년 4월 20일 유팽로가 고향인 곡성 옥과로 내려오는 중 순창 대동산에서 500여 명의 정체 모를 군사들이 운집해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평소 조정의 실정과 수탈로 인해 불만이 많았던 일부 군인과 백성들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왜적과 한편이 되려고 한 여러 고을의 부랑자들로, 읍성을 점령해 왜군에게 바치려던 무지몽매한 반란군이었다.

이것은 조정의 실정과 수탈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된 상황에서 나타난 사회현상의 하나로 국가에 대한 불신현상이 전란과 함께 폭발했다고 볼 수 있다.

부랑자 무리 앞에 선 유팽로는 대의와 불의, 옳고 그름에 대해 피력하고 “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이니 나와 같이 나라를 위해 싸우자”라고 설득해 이들을 의병으로 이끌었다. 유팽로는 그 자리에서 의병을 결성하고 ‘전라도 의병 진동장군 유팽로(全羅道義兵 鎭東將軍 柳彭老)라 쓴 깃발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의병규합에 나서게 된다.

 “청기를 세우고 쓰기를 전라도 의병 진동장군 유팽로라고 썼다.” 「월파집」中-
“대동산 앞뜰에 이름 없는 군사들이 있어 알아보니 여러 고을의 부랑배들이었다.” 「월파집」 중-
“순창, 옥과의 군사들이 원격지 전투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난중잡록」 中-

임진왜란 초기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의병이 앞다투어 일어났다.

호남 의병을 일으킨 주역은 광주의 고경명, 옥과의 유팽로, 나주의 김천일이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최초의병장으로 알려진 홍의장군 곽재우는 경남 의령에서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켰지만, 유팽로의 의병은 곽재우 의병장보다 이틀 앞선 4월 20일 일으킨 것으로 곽재우 의병장보다 이틀 빠른 임진왜란 최초의병장이라는 점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무지몽매한 반란군에서 의병으로 다시 태어난 유팽로의 기병 2백여 명, 보병 3백여 명의 군사들은 훗날 담양 추성관에서 결성되는 7천여 명의 호남 연합의병 구심점이 되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초석이 된다.

<2편 호남 연합의병과 제1차 금산성 전투는 추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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