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한·말 의병활동과 충장·금남로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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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말 의병활동과 충장·금남로는 어땠을까?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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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魚登山), 전국 최대 의병항쟁 격전지 '물고기가 산으로 올라간다' 뜻 '의병들의 아픈 죽음' 비유
충장로는 충장공 김덕령 장군, 금남로는 금남군 정충신 장군을 충절을 기리기 위한 도로명
금남로,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등 불의에 항거한 역사의 현장 민주화 성지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26]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일제강점기, 한·말 의병활동과 충장·금남로의 문화역사이야기'를 살펴보는 「광주전남 민속문화의 숨결을 찾아서」 마지막편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근·현대 역사전시실 이야기다.

광주 역사민속박물관 이야기는 △1편 민속전시실(전라도의 생활환경) △2편 민속전시실(전라도의 사회문화) △3편 근·현대 역사전시실(광주읍성) △4편 근·현대 역사전시실(조선시대 사회문화)이 연재됐으며, 이번엔 제 5편 근·현대 역사전시실(일제강점기 충장로와 금남로)이 다뤄진다.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근대역사실/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한·말 의병

한·말 의병투쟁은 을미사변(1895년)을 겪으면서 경술국치(1910년)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 펼쳐진 전쟁으로 위정척사사상을 앞세운 유생들과 동학 혁명군에 참가했던 농민들이 주도했으며 점차 신돌석 등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 등장하기도 한다.

의병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발생한 을미의병, 을사조약을 계기로 발생한 을사의병, 고종 퇴위와 군대해산의 원인이 되어 발생한 정미의병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특히 정미의병은 해산된 군인들이 참여하면서 의병의 규모가 확대되고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1913년 전라남도 경무과(일본 경찰)에서 작성한 ‘전남폭도사’에는 전남 의병활동 시기와 대표 의병장을 제1기(1906~1907) 최익현·고광순·기삼연, 제2기(1908) 김태원·김율, 제3기(1909) 전해산·심남일·안규홍을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인 백암(태백광노) 박은식 선생은 “대체로 각도의 의병을 말한다면 전라도가 가장 많았다”라고 평가했으며, 1908년 일본 군경의 교전회수와 교전 의병 수에서 전라도는 각각 25%와 24.7%, 1909년에는 각각 47.2%와 60%를 차지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호남 한·말 의병은 1896년 장성 출신 송사 기우만으로부터 시작된다.

기우만은 광주향교를 중심으로 의병을 모았고 장성의 기삼연이 합류하면서 절정을 이뤘으나 고종의 어명으로 기우만 의병부대는 대부분 해산된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는데 광주에서도 기삼연, 김준(태원)·김율 兄弟, 양진여·양상기 父子, 전해산, 심남일 등을 중심으로 많은 의병투쟁이 전개된다.

당시 의병부대는 많게는 150여 명, 적게는 수십 명 규모로써 지형지물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대항했지만, 일본군의 현대화된 무기에 비해 보잘것없는 무기의 열세로 의병의 피해가 일본군의 피해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1908년 광주지역 의병 200여 명이 전사했는데, 호남창의회맹소를 만들어 의병을 일으킨 기삼연(1851~1908)은 1908년 2월 광주천 서천교 백사장에서 재판도 없이 총살당하고 1908년 4월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 죽봉 김준(태원)은 일본군과 접전 끝에 광주 어등산에서 23명의 의병과 함께 순국했으며 그의 동생 김율은 형의 죽음을 확인하러 갔다가 총살당한다.

이처럼 광주 어등산은 전국 최대의 의병항쟁 격전지였다.

어등산(魚登山)은 ‘물고기가 산으로 올라간다’라는 뜻으로 물고기가 물에서 놀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면 죽는 것인데 의병들의 아픈 죽음을 산으로 간 물고기에 비유했다고 전한다.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두 달간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펼쳐 의병 500여 명을 학살하고 1,500여 명을 체포했다. 이때 남도의 대표적 의병장인 양진여, 심남일, 안규홍 등이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이후 광주 의병활동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의병의 절의 정신은 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5·18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광주의 정신으로 계승된다.

한말 의병/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한말 의병/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위 사진은 경북대 김의환 교수가 1980년대 일본 오사카의 한 고서점에서 입수한 것으로 ‘남한폭도대토벌 기념사진첩’에 수록된 사진 중의 하나다.

사진 속 인물들은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 중에 일본군에 붙잡힌 의병장들의 모습으로 이들은 사진 촬영 얼마 뒤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양진여·양상기는 부자(父子) 의병장이었고, 김원국·김원범은 형제(兄弟) 의병장이었다. 안규홍은 머슴 출신의 의병장으로 심남일·전해산과 함께 호남의 3대 의병장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광주 출신 양진여·양상기 부자(父子)의병장은 대구감옥에서 두 달 간격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교수형을 당한 전국 유일 의병장이다.

‘양진여’는 지금의 광주 북구 중흥동에서 주막집을 운영했다고 한다.
1908년 나라가 망해간다는 얘기를 듣고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광주 일대에서 친일파들을 찾아내 응징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했다.

‘양상기’는 ‘양진여’의 아들로 순사(경찰)였으나 아버지의 의병활동으로 직장을 잃고 그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병활동 중 붙잡혀 순국했다.

의병장 신덕균 조총/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의병장 신덕균 조총/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신덕균(1878~1908)은 광주 각화동 출신의 한·말 의병장이다.

1906년부터 의병 참여에 뜻을 두었고 1907년 전라도 창평에서 재결성된 고광순 부대의 참모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광순 부대가 일본군의 급습으로 지리산 피아골에서 전사하고 흩어지자 단독으로 병력을 모아 지리산 일대에서 전투를 치렀다.
1908년 순창 회문산에서 왜군에게 붙잡혀 정읍 고부에서 순국했다.

전남도청/1930년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전남도청/1930년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역(1930년대)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역(1930년대) [사진=정성환 기자]
흥학관 모형도/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흥학관 모형도/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영화 「이름 없는 별들」 대본, 포스터(1959년)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영화 「이름 없는 별들」 대본, 포스터(1959년)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불로동 164번지/광주농업학교/신문잡지종람소/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불로동 164번지/광주농업학교/신문잡지종람소/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관찰부에서 도청으로

전남 관찰부는 광주 관아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1896년 전남 관찰부 출범 당시에는 지금의 전일빌딩과 상무관 쪽에 있었는데 1910년 옛 도청자리로 옮기면서 이름도 관찰부에서 도청으로 바뀌게 된다. 초기에는 목조건물이었는데 1930년 2층 붉은 벽돌, 1970년 3층 건물로 증축했다.

△ 광주역
1922년 송정리역과 광주 시내를 잇는 철도가 놓이고 대인동 동부소방서 자리에 광주역이 개통되면서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었다.

철도 개통으로 중등학교가 설립되어 열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늘면서 한·일 학생들 간 충돌이 일어나 항일의식을 증폭시키는 역할도 했다.

광주역은 1929년 11월 3일 한·일 학생 간의 집단 싸움이 일어난 장소로써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격전지였다.

1969년 대인동에서 현재 광주역이 있는 중흥동으로 이전해 ‘신역’이라 불리기도 했다.

△흥학관
흥학관(興學館)은 지금의 구 시청 사거리 근처에 있었던 건물로 일제강점기 신간회 광주지회와 광주청년동맹을 비롯한 10여 개의 단체가 들어서 있었다.

이곳은 광주 청년운동의 거점이었으며 일제강점기 항일 학생운동의 근거지로써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본거지였으며 각종 사회단체의 회의 장소, 공연장, 강연장, 야학, 체육도장 등이 있어 광주 청년의 ‘민족정신수양소’ 역할도 했으며 불우한 학생들을 위해 일본 유학생들이 조선어와 조선 역사를 강의했던 곳으로 광주정신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흥학관 부지는 원래 일본인 소유였는데 양림동의 부호 최명구 선생이 인수해 자신의 61번째 생일을 맞아 광주 최초의 근대 공립학교인 광주 보통학교(서석초등학교)동창회관에 기부할 목적으로 지어 민중계몽과 문화계몽의 산실로 이용되어 오다 1942년 최명구의 아들인 최상현이 광주에 기부했다고 전한다.

흥학관은 해방 전까지 광주 ‘식량배급조합’ 사무실이었는데 광복 후 광주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었고 1960년대 광주시청이 광산동에서 계림동으로 이전하면서 광주정신이 깃든 청년들의 본거지 흥학관은 철거되어 그 흔적은 사라리고 없다.

△ 영화 「이름 없는 별들」
완도 출신 작가 최금동이 각본을 쓴 작품으로 최금동의 부친은 한·말 의병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함평 출신인데 한·말 의병에 참여한 전력 때문에 고향을 떠나 완도에서 살았다고 한다.

1959년에 상영된 「이름 없는 별들」이라는 영화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30년 후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100분으로 1959년 서울과 광주에서 동시 개봉되어 광주에서는 동방극장(무등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광주에서 촬영했으며 단역으로 출연한 학생들 모두 광주지역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불로동 164번지에 얽힌 이야기 
1908년 불로동 164번지 일대에는 ‘사립측량학교’가 세워지고 개화파가 주동이 되어 ‘대한협회 광주지부’가 창설된 곳이다.

1910년 이 건물에 광주농업학교 들어섰고 광주농업학교는 1912년 임동으로 이전했다 그 후 건물은 1912년부터 1917년까지 10대 소년들이 모여 출판물을 읽고 토론하는 ‘신문잡지종람소’로 사용되었는데 이곳이 학생 비밀결사 항일운동의 본거지였다고 전하며 종람소 회원들은 1919년 3‧1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신문잡지종람소 건물은 1917년부터 광주면사무소로 사용되었고 면사무소는 1925년 지금의 구 시청 사거리 근처로 신축 이전했다.

최초 학생비밀결사/성진회 회원/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최초 학생비밀결사/성진회 회원/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 학생 독립운동과 성진회
성진회는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보생 왕재일과 장재성이 주도하여 결성한 광주 최초 학생비밀결사 단체였으나 조직의 비밀이 탄로 날 우려가 있어 결성된 지 3개월 만인 1927년 2월 4일 해체된다.

성진회 결성의 주역은 광주고보생 4학년 왕재일이었다.
왕재일은 ‘송홍’ 선생에게 우리 역사와 민족정신에 대한 교육을 받고 감화를 받아 항일의식을 키워나갔으며 그의 항일정신은 학생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밑바탕이 되어 장재성 등 16명이 모여서 성진회를 결성하게 된다.

‘성진회’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차별 교육과 식민통치에 항거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동료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어주었고 단결을 이끌었다.

성진회의 활동 기간은 3개월에 불과했지만, 성진회가 해체된 이후 광주지역 학생들이 독서회라는 방식으로 비밀 연대를 구축해 향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광주, 도시화의 여정/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 도시화의 여정/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 도시화의 여정
광복을 맞던 해, 광주 인구는 8만여 명, 이후 여·순 사건과 6·25전쟁, 1960~70년대 호남을 휩쓴 가뭄과 가난을 피해 많은 이들이 광주로 몰려들었는데 그중에는 교육과 일자리를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다.

광주 인구는 1960~70년대에 30만에서 70만으로 늘었는데 역사상 광주 인구가 이처럼 빠르게 늘어난 시기는 없었다고 한다.

광주는 갑자기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주택난, 물 부족에 시달렸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택지를 조성하고, 수원지를 새로 확충해서 물 부족 현상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광주에서 수돗물 공급은 1920년 증심사 계곡에 댐을 쌓으며 처음 시작되었는데 공급과 동시에 수돗물이 부족하여 1960년대까지 광주 사람 10명 중 절반만 수돗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1971년 동복댐이 완성되면서 수돗물 공급이 안정되자 동복댐 물이 광주에 처음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1971년에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광주시는 동복댐이 완공되면 물 부족 현상이 해소될 것으로 판단했으나 또다시 물 부족에 시달리자 상수도 공채를 팔아 동복 댐을 증축하게 된다.

“수도 공채 모두 사서 식수난을 해결하자”라는 표어가 그 시대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경양방죽(1960년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경양방죽(1960년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신안동 태봉산(1960년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신안동 태봉산(1960년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태항아리/태지석 [사진=정성환 기자]
태항아리/태지석 [사진=정성환 기자]
태봉산 태실/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태봉산 태실/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경양 방죽과 태봉산의 태실

광주 도시화 과정에서 경양 방죽 매립과 태봉산을 헐어 없애버린 것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경양 방죽은 조선 세종 때(1440년) 광주 목사 ‘김방’이 만든 호수로 1960년대에 지금의 계림동 홈플러스 일대에 있었던 면적 20만㎡의 인공호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부가 매립돼 호수는 6만㎡로 줄어들었고 1967년 광주시가 택지조성을 위해 태봉산의 흙을 가져와 경양 방죽을 메웠다고 한다.

태봉산은 해발 50m의 아주 낮은 산으로 신안동에 있었으며 아이의 태를 묻은 산이라 하여 태봉산이라 했다고 한다.
1960년 중반까지 광주역 근처에 있었으나 경양 방죽을 메우기 위해 헐렸으며 지금은 광주역과 전남대 사거리 구간에 태봉산 유래비만 세워져 있고 태봉산의 흔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없다.

태봉산에는 조선 시대 인조임금의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이기도 한 용성대군의 태를 묻었던 곳으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한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피신 왔는데 넷째아들인 용성 대군이 태어나 그의 태를 계룡산에 묻었는데 노승이 나타나 왕자의 태를 광주 고을 여의주 모양의 작은 산에 안장하라고 일러주어 태봉산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세월이 흘러 1928년 광주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농민들은 가뭄의 이유가 태봉산에 누군가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동네 아낙들이 가뭄에서 벗어나기 위해 태봉산의 무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태를 담은 백자 항아리와 지석, 금붙이 한 장을 발굴했다고 한다.

태지석에는 명나라 연호 천계 4년(1624년) 9월 3일 진시(오전 7~9시)에 태어난 임금의 아들 아기씨의 태를 천계 5년 3월 25일 이곳에 묻었다고 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왕남대군 아기씨’가 누군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조선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따르면 태지석의 아기씨와 「선원록」에 나온 용성대군의 출생일이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아기씨는 인조임금의 넷째아들 용성대군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1957년 광주우체국 앞 네거리(우다방)/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1957년 광주우체국 앞 네거리(우다방)/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로(광주우편국) 모형도/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로(광주우편국) 모형도/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충장로

충장로는 시내로 통했다. 시내가 곧 충장로라는 뜻이다.
충장로는 영원한 청춘의 거리요 낭만이 숨 쉬는 젊은 시절 추억의 거리였으며, 충장우체국 사거리는 ‘우다방’으로 불리며 연인이나 친구를 만나는 만남의 광장이었다.

충장로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6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길이다.
이 길은 광주 읍성의 남문과 북문을 잇던 길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에는 현재 충장우체국(우다방) 사거리에서 북문 터가 있던 충장 치안센터 앞까지는 북문 안 거리(현 충장로 2~3가), 그 너머는 북문 밖 거리(충장로 4~5가)로 불리다가 1910~1920년 일제강점기 때 충장로 우체국을 기준으로 ‘북문통’과 ‘남문통’으로 구분해서 불렀다고 한다.

1930년대부터는 이를 하나로 묶어 혼마치 즉, ‘본정’이라 했고 이때 길을 다섯 구간으로 나누어 1~5 정목(丁目) 이라 했으며 충장로 1가는 본정 1정목, 금남로 1가는 명치정 1정목 식으로 불린 것으로 오늘날 충장로를 1가부터 5가까지 나눈 역사가 된다.

조선 시대 충장로에는 상가가 거의 없었다. 충장로가 상가로 바뀐 것은 1900년대부터다. 최초의 상점은 충장우체국 부근에 있었다고 전하며 몇 년 뒤 충장로 2가에 일본인 잡화점 ‘염옥상점’이 문을 열면서 충장로 상가의 출발점이 됐다고 한다.

이후 충장로 1~3가에는 잡화를 파는 일본인 상점들이, 충장로 4~5가에는 옷감을 파는 한국인 상점들이 들어선다.
‘남창상회’는 포목상을 했던 심덕선(1895~1943)의 가계로 충장로 4가 옛 화니 백화점 후문 쪽에 있었다고 한다.
‘아오노 잡화점’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술 도매상으로 충장로 2가에 있었다.
‘광주극장’은 1935년 개관 당시 ‘조선 제일의 극장’이라는 극찬을 받았다고 하며 일제강점기 광주 최초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극장으로 유은학원(현 광주 동성고) 설립자인 ‘최선진’ 씨가 건립했다고 한다.
이곳은 복합 문화공간으로써 <홍길동전>과 <춘향전> 등 민족 영화가 상영되었고 가수의 공연, 정치인의 강연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본정통’이라 불리던 길은 1947년 충장로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충장로’는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의 시호를 따서 붙인 도로명이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무등산 자락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의병의 총수로서 경상도 진해와 고성지방을 방어하며 왜군의 호남진출을 막았으나 그를 시기하는 세력에 의해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악형 끝에 29살의 젊은 나이에 옥사한 광주의 영웅이기에 충장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광주의 명동으로 불린 충장로 1~3가는 쇼핑공간과 음식점, 카페 등이 있어 화려하고 4가는 한복집, 포목집, 혼수전문점이 있어 차분하면서도 한적한 편이며 5가로 내려가면 소매상보다는 도매상이 많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충장로는 금남로와 더불어 민주화운동의 성지, 청춘과 낭만의 거리로 불리며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의 증인이 되어 광주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금남로/1930년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금남로/1930년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1950년대 금남로 단풍나무/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1950년대 금남로 단풍나무/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1967년 금남로 확장공사 때 베어버린 단풍나무 뿌리/수령 350년/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1967년 금남로 확장공사 때 베어버린 단풍나무 뿌리/수령 350년/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금남로3가(1967년)/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금남로3가(1967년)/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전남도청 앞 분수대(1970년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전남도청 앞 분수대(1970년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도청 앞 분수대/1980년 5·18민주화운동 민족·민주화 성회 대회/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도청 앞 분수대/1980년 5·18민주화운동 민족·민주화 성회 대회/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금남로 탄생과 변화

금남로는 조선시대 광주 관아가 있던 곳으로 1896년 광주가 전남 관찰부의 소재지로 결정되면서 관찰부는 광주 관아 건물들을 인수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충장로는 조선 시대부터 있었으나 금남로는 일제강점기 때 만든 도로이다.

1920년대에 시작해서 1930년대에 완성하여 일본 천왕의 이름을 따서 ‘명치정’이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광주 읍성에 속한 지역으로 1가는 북내(北內), 2가는 성내(城內), 3~5가는 성저(城底)라고 불렸다고 한다.

일제는 처음부터 권력 상징의 거리로 금남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출발점은 전남도청이었으며 이후 일본군 헌병대와 법원 등 시민지배 권력기관이 들어서게 된다.

금남로는 처음 만들어질 때는 폭이 12m 정도였는데 1960년대 후반에 30m 정도로 현재 금남로의 모습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확장공사 과정에서 광주 관아의 건물과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사라졌으며 1929년 학생 독립운동 당시 학생들을 임시 구금 장소로 쓰였던 ‘무덕전’도 자취를 감췄다.
이후 금융, 대기업 지역본부, 언론사 등이 이곳에 밀집하기 시작했고 전일빌딩을 비롯한 고층빌딩이 세워지면서 광주의 중심거리로 변모했다.

금남로는 조선시대 이괄의 난을 평정한 정충신 장군의 군호 ‘금남군’에서 따온 도로명으로 해방 후인 1947년 8월 15일 지어졌다.
정충신 장군은 고려 때의 명장 정지 장군의 9세손으로 광주에서 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권율의 휘하에서 종군하다 이치전투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적진을 뚫고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장계를 전달했다.
선조는 승전소식에 명나라 망명을 포기하고 그에게 천민에서 평민으로 신분을 상승시켜주었고 병조판서 이항복은 그의 영특함에 매료되어 ‘충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정충신은 무과에 급제하여 양반이 되었으며 인조 때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1등 공신이 되어 금남군에 봉해졌다.

금남로는 이승만 독재정권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가 전국 최초로 열린 곳이며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피로써 불의에 항거한 역사의 현장이며 민주화의 성지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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