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민속문화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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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민속문화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을 찾아서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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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편] 연재 중 [1편] 민속전시실, 전라도의 생활환경 편
전라도, 전주의 ‘전’과 나주의 ‘나’를 따서 ‘전라도’ 지칭
호남, 호수의 남쪽...금강의 남쪽에 있는 땅을 뜻함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22] 정성환 기자 = 이번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는 광주·전남 민속문화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을 찾아서다. 이번 이야기는 총 5편의 이야기 중 1편 민속전시실의 전라도 생활환경편이다.

다섯편의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이야기는 △1편 민속전시실(전라도의 생활환경) △2편 민속전시실(전라도의 사회문화) △3편 근·현대 역사전시실(광주읍성) △4편 근·현대 역사전시실(조선시대 사회문화) △5편 근·현대 역사전시실(일제강점기 충장로와 금남로)로 구성된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사진=정성환 기자]

◆ 첫번째, 광주역사민속박물관 민속전시실의 전라도의 생활환경 편

△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설립 배경

1963년 광주의 명소인 광주공원 현충탑 옆에 96평의 소규모 도립 광주박물관을 개관해 매장 문화재 유물을 전시 개관했다.

이후 신안 해저유물이 발견되면서 1978년 국립광주박물관이 새로 건립되어 광주박물관의 매장 문화재 업무와 유물들이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이관돼 광주박물관은 기능이 축소되고 관람객 또한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이에 광주의 뜻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광주전남지역의 민속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1987년 11월 1일 현 위치에 광주전남지역의 민속박물관을 신축 개관했다.

이후 30여 년이 흐른 2018년 7월 광주민속박물관을 새롭게 단장해서 2020년 5월 광주 역사민속박물관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광주 역사민속박물관을 들어서면 박물관 로비 전면에 칠석동 고싸움놀이 부조 조각작품이 한눈에 들어온다. 로비 위에 보이는 등(바리솔)은 부안 내소사 대웅전의 꽃살 문양이라고 한다.

전시관은 1층 남도 민속실과, 2층 광주 근‧현대 역사실로 구성돼 있다.

남도민속실/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남도민속실/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전라도의 명칭은 남도, 전라도, 호남 등으로 표현하는데 통상적으로 남도하면 전라도를 지칭하는 말로 따뜻함이 담겨있다고 한다.

전라도라는 명칭은 고려 현종 9년 때인 1018년 행정구역 이름으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며 전주의 ‘전’과 나주의 ‘나’를 따서 ‘전라도’라 했다고 전한다.

호남이란 호수의 남쪽이란 뜻으로 금강의 남쪽에 있는 땅이라고 한다.

예전엔 강을 호수라고도 불렸는데 호수라는 뜻은 김제 벽골제라는 설과 금강이라는 설이 있는데 금강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조선시대에 전라도를 그린 지도를 보면 금강을 전라도, 또는 호남의 경계선으로 표시했고, 고려시대에는 전북을 강의 남쪽이라 해서 ‘강남도’라 불렸다는 것은 금강을 경계선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896년에 전라도가 전라남도와 북도로 나뉘게 되고, 1946년에 전남과 제주도가 나뉘게 된다.

1986년에 광주와 전남이 나뉘면서 현재와 같은 행정구역이 완성됐다.

광주라는 지명은 서기 498년 백제 동성왕 때 ‘무진주’라는 이름으로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광주는 무진주, 무주, 서석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고려 태조 때 처음으로 광주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전라도 지도 (1850년대) [사진=정성환 기자]
전라도 지도 (1850년대) [사진=정성환 기자]

우리나라에서 지도는 삼국시대부터 그려졌다고 한다. 광주의 지도는 조선시대에 그려진 40여 점이 전해져 내려온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이 300여 개의 고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 50여 고을이 전라도에 속했다고 한다.

이 지도는 전라도에 분포한 50여 고을과 주요 역, 군사기지 등이 그려져 있다. 붉은 바탕에 검은 글씨로 표시했는데 제주도와 충남 금산이 전라도에 속해있고 완도가 강진에 딸린 섬으로만 묘사된 점이 지금과 다르다.

△ 호남가
“함평 천지 늙은 몸이”로 시작되는 단가로 조선시대 전라도 50여 고을의 이름이 등장한다. 원래 작자와 창작시기는 알 수 없다고 하며 ‘신해효’가 정리한 사본과 이본이 전해 내려온다.

내용은 호남지방 여러 지명을 통해 지방의 특색과 풍경 등을 담고 있다.

△남도의 농업

남도의 농업/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남도의 농업/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표방하면서 농업을 주 생업으로 삼고 살아왔으며 농사는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다고 한다.

쌀과 보리를 주 작물로 하는 우리의 농업은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때문에 계절별로 농사구분이 이뤄졌다고 한다.

봄철에는 밭을 갈고 씨 뿌리며, 여름철에는 모내기와 물 대기, 가을철에는 곡식을 거두고, 겨울철에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음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순환체계를 이루면서 살았다고 한다.

일손이 부족할 때는 마을 단위로 20~50명 정도가 두레를 결성하여 노동의 효율을 높이고, 농악놀이가 어울려 지역민들의 수고를 위로하고 화합을 다지며 생활했다고 한다. 

농사와 도구/따비, 쟁기, 홀태 등/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농사와 도구/따비, 쟁기, 홀태 등/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봄 농사는 갈이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비는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 시대부터 땅을 팔 때 삽처럼 사용한 인류 최초의 농기구였으며, 이 농기구가 발전한 것이 쟁기라고 한다.

쟁기는 청동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똑같은 형태로 내려오는 유물이다. 쟁기질에는 소 두 마리가 끌면 ‘겨리쟁기질’, 소 한 마리로 끌면 ‘호리쟁기질’이라고 한다. 전라도에서는 흙이 부드러워 ‘호리쟁기질’을 했다고 한다.

농사를 지으려면 물이 필요한데 옛날에는 물이 많은 곳에서 적은 쪽으로 물을 보내기 위해 용두레나 맞두레를 사용했다고 한다.

모를 심는 방법에는 직파법과 이앙법이 있으며 수리시설이 부족한 조선 전기에는 직파법을 사용했고, 수리시설이 확충된 조선 후기에는 이양법을 사용했다.

이앙법이 시행되면서 노동력은 줄어들고 생산량은 증가하여 광작이 성행했으며 부자 농민의 출현으로 빈부격차가 발생했다고 한다.

모내기 후 호미를 이용해 김매기를 하고 ‘낫’으로 벼를 수확해 홀태나 개상으로 탈곡하여 디딜방아와 매통 등으로 도정해 보관했다.

광주 칠석동 고싸움놀이 부조/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 [사진=정선환 기자]
광주 칠석동 고싸움놀이 부조/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 [사진=정선환 기자]

고싸움놀이는 정월 대보름 무렵 전남 여러 지역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마을의 민속놀이이다.

광주 칠석동에서는 동부, 서부로 편을 갈라 고싸움을 하는데 동부는 남성, 서부는 여성을 상징하며 서부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전해져 온다.

광주광역시 칠석동의 고싸움놀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특히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때에 식전‧후 행사, 2002년 월드컵 세계우수문화축제 시연(최고 민속놀이 지정) 등 여러 차례 세계인들에게 소개되어 국제적으로도 관심이 높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명성이 높다.

△남도의 농악

농악/장구, 상모, 소고, 징 [사진=정성환 기자]
농악/장구, 상모, 소고, 징 [사진=정성환 기자]

농악이란 벼농사 지역의 문화이며 좌‧우 농악이 있다고 전해지며 함경북도 지역은 벼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농악이 없다고 한다.

농악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 전라도이다.

지리산 기슭에서 발달한 농악이 좌도 농악이고, 평야 지역에서 발달한 농악이 우도 농악이다.

우리 지역은 호남 우도에 속한 광산 농악이 전해지고 있다.  좌·우 농악은 우선 복색이 다르다고 한다.

좌도 농악은 전립, 우도 농악은 고깔을 쓴다고 하며 좌도는 산악 지역인 만큼 장단이 웅장하고, 우도는 평야 지역이라 가락이 섬세하고 곱다고 한다.

좌도에서는 가락이 웅장하여 북이 많이 발달하였고, 우도에서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장구가 발달했으며 북이 남자라면 장구는 여자라고 한다.

지역적으로 보면 경상도는 북 놀이가 발달했고 전라도는 장구놀이가 발달했다.

△남도의 집

한옥/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한옥/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전라도 지역은 비교적 온난한 기후 환경 때문에 통풍이 잘되는 일자(一字)형 가옥 구조에 마루와 온돌방이 공존했다고 한다.

더운 여름에는 시원 마루에서,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온돌에서 생활하며 뚜렷한 사계절의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경북지방의 ‘ㅁ’자형, 중부지방의 ‘ㄱ’자형 등과 구별되었다.

사랑방/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사랑방/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사랑방은 남성들의 공간으로 안방과는 분리되어 있다. 남성들은 이곳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썼고, 사회적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했다.

사랑방에는 학문과 사색을 위한 가구를 놓았는데, 탁자, 책상, 경상 등이 대표적이다.

대청(마루)/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대청(마루)/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대청은 방과 방 사이에 마련되었다. 대청을 앞문을 들어 서까래의 걸쇠에 걸쳐 보다 개방적인 구조로 이용할 수 있었고, 이곳에 구들(온돌)이 아닌 우물마루를 깔아 시원한 여름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대청에서는 집안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제례의식이 행해지고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는 신성한 장소이며 항상 성주신을 모시는 장소이기도 하다.

쌀 뒤주, 안반, 석작 등 자주 쓰는 살림살이 등을 보관하였다.

안방/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안방/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안방은 주택의 제일 안쪽에 위치하며 안주인(마님)이 거처하는 방으로 외간남자의 출입이 금지된 곳으로주부의 실내 생활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전라도에서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며느리가 안방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광의 열쇠나 귀중품들이 보관되는 장소이며 주부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소이다. 안방에는 장롱, 반닫이, 반짇고리, 횃대(옷걸이) 등이 있다.

부엌/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부엌/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부엌은 음식 조리와 동시에 난방을 담당하는 공간이다.

부뚜막 아궁이는 취사와 난방을 모두 가능케 했다.

부뚜막 솥과 솥 가운데 있는 조왕중발(자그마한 그릇)이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이다. 조왕신은 가장 한국적인 모성애를 보여주는 신앙으로 가족의 번창을 돕고 액운으로부터 호호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신이라고 전한다.

온돌/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온돌/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온돌은 과학적인 원리를 이용한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장치로 평가 받고 있다.

철기시대 초기의 집터 유적에서 구들장이 발견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온돌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은 “성균관 학생들이 습질에 걸리는 일이 많으니 온돌과 목욕탕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는 기록을 보면 온돌이란 말이 조선 세종 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문화재청에서는 ‘온돌문화’를 무형 문화재로 지정했다.

장독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장독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옛말에 그 고장의 정치가 안정되어 있는지를 보려면 술맛을 보고, 그 집 음식 맛을 보려면 장맛을 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장’은 음식 맛을 좌우하는 귀한 것이기 때문에 ‘나쁜데 갔던 발은 들어오지 마시오.’의 뜻으로 장 항아리에 버선을 거꾸로 붙여 놨다고 한다.

이것은 무언가를 금기시할 때 사용한 ‘역행민속’으로써 보통의 새끼는 오른쪽으로 꼬는데 금줄을 칠 때는 왼 새끼로 꼰다던가, 장독대에 버선을 거꾸로 붙인다던가, 뱀 부적을 거꾸로 붙이는 것 등을 ‘역행민속’이라고 한다.

<두번째 이야기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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