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택시에서 안 내렸어야 했는데"…대화로 풀자더니 '무차별 곤봉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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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택시에서 안 내렸어야 했는데"…대화로 풀자더니 '무차별 곤봉질'
  • [투데이광주전남] 미디어뉴스팀
  • 승인 202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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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지난달 31일 오후 광주 북구 용봉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5·18 유공자 전종태씨(66)가 그날의 기억을 설명하고 있다. 2022.1.1/뉴스1

[투데이광주전남] 미디어뉴스팀 = "집이 좀 많이 춥고 더러워서…. 불편할 수 있는데 놀이터에서 인터뷰하는 건 어때요?"

2021년의 마지막 날 광주 북구 용봉동 한 주택가 골목에서 만난 전종태씨(66). 자신의 집 문 앞에서 쭈뼛거렸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겠거니 싶었다. 5·18 유공자들의 실제 삶도 궁금해 "괜찮다"며 집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벽과 바닥 곳곳에는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집 안이 바깥만큼 추웠다. 방바닥은 너무 차가워 신발을 신고 다녔다. 거실에는 근처 폐업한 편의점에서 주워왔다는 야외용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전씨가 믹스커피 한 잔을 타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앞에 두고서야 전씨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춥게 얼어붙어 군데군데 피부가 갈라져 있었다. 손도 잔뜩 부르터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이빨이 덜덜 떨리도록 추웠다. 입김이 절로 나왔다. 전씨의 애달픈 삶은 40여년 전 그해 봄에 시작됐다.

1980년 5월. 전씨는 북구 신안동에 살며 전남 화순의 한 자동차정비소에서 정비원으로 일했다. 자동차가 많지 않은 시절이라 벌이가 좋았다. 당시 월급으로 10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일요일인 5월18일, 친구들과 전남대에서 멀지 않은 한 중화요리 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왔다. 젊은 전씨의 눈에 '눈이 시뻘건' 군인 무리가 보였다.

"하도 시끌시끌헝께 들여다 봤제. 공수부대들이 겁나 많드라고. 사복 입은 놈들도 한 100명쯤 됐으까? 약을 처먹은 건지, 눈이 시뻘개서 사람들을 패드라고."

군인들은 학생, 시민 가릴 것 없이 멱살을 잡아끈 뒤 무차별 몽둥이질을 해댔다. 한 남학생의 뒤통수가 터져 피가 철철 흘렀다.

시민들은 맞으면서도 살기 위해 도망쳤다.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고 화물차에 던져 져 어디론가 실려 갔다.

겁이 난 전씨와 친구들도 반대편으로 무작정 달렸다. 서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집으로 도망쳤다. 집에 들어와 겨우 한숨을 돌렸지만 전씨의 머릿속엔 좀전의 참상이 생생히 떠올랐다.

외출을 다녀온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 모습을 목격했다고 했다. 부모는 동생들과 종태씨에게 절대 바깥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이튿날인 19일, 전씨는 하루 내내 집안에 꼭꼭 숨어 있었다.

하지만 시국이 엄혹해도 출근은 해야 했다. 20일 전씨는 화순에 있는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제41주년 5·18민중항쟁 민주기사의 날'을 맞은 지난 5월 20일 오후 광주 북구 유동사거리 일대에서 태극기를 단 70여대의 민주택시노동조합 관계자들의 택시가 차량행렬 시위를 하고 있다. 2021.5.20/뉴스1 © News1 정다움 기자

 

 


출근길 차창 너머로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험상궂게 생긴 군인들이 시민들을 무릎 꿇리고 벌을 세우고 있었다. 군인들의 타깃은 '누구든' 될 수 있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폭행과 살인이 이어졌다.

전씨는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우리가 뭣을 잘못했길래 갑자기 군인들이 들어온 건지, 아무 이유도 없이 왜 맞아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지. 일단 저것들을 몰아내야 쓰것다는 생각만 들더라고."

자동차 정비 일을 하다 보니 화물차와 버스, 택시 운전사로 일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퇴근을 두어 시간여 앞두고 택시 운전을 하는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전날 동료 중 한명이 군인의 대검에 찔려 죽었다고 했다. 우리 고장에서 군인들을 몰아낼 수 있도록 데모에 참여하자고 했다. 전씨도 맞장구를 치며 회사를 나와 광주로 향했다.

그날 오후 6시 광주 북구 임동에 있는 무등경기장(현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는 수많은 화물차와 버스, 택시가 모였다. 전씨는 친구가 운전하는 택시 조수석에 올라탔다. 전씨의 차량이 맨 선두에서 달렸다.

"길이 빼곡할 정도로 가득 찼어, 200대는 족히 됐제. '빵빵' 경적을 울리면서 창문을 내리고 '군인들은 물러가라'고 외치다본께 그제서야 가슴이 막 뜨겁고 뿌듯하더라고."

목적지는 전남도청. 무등경기장에서 광주역, 공용터미널을 지나 금남로 전남도청까지 약 4㎞ 거리였다. 무등경기장을 출발해 1㎞쯤 서행하며 광주역 못미쳐 신안사거리를 지날 때쯤이었다. 공수부대원 몇명이 전씨가 탄 차량 보닛을 치며 "잠시 내려보라, 협상을 하자"고 했다.

전씨와 운전하던 친구는 협상하자는 말에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대화로 해결하자던 공수부대는 이들이 차에서 내리자 태도가 바뀌었다. 허리춤에서 곤봉을 꺼내더니 무차별 몽둥이질을 시작했다.

"차에서 안 내렸어야 되는 거여. 도청 앞까지 갔었어야 하는디…. 뒤에 따라오던 애들은 우리가 맞는 걸 보고 차에서 안내리고 도청으로 계속 가는디 우린 이미 내렸으니 맞고 있어야제 어쩌겄어. 한둘이면 힘으로 이길 자신이 있는데 몇 놈이 붙어서 패니 장사가 없더라고."

한참을 두들겨 맞고 전남대로 연행됐다. 본관 건물에는 이미 붙잡혀 온 200명이 노끈에 묶인 채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전씨와 친구도 뒷짐을 지게 한 뒤 노끈으로 손목을 묶었다. 전씨는 "손목이 아릿하고 땡땡하게 부었다"며 두툼한 자신의 손목을 만졌다.

택시 시위대의 선두에 있던 전씨는 불순분자, 주동자로 몰렸다. 주동자들에게는 더욱 심한 고문이 자행됐다.

"군인들이 주동자 몇을 추리드만 벽으로 몰아. '꼿발'(까치발)을 들고 엉덩이를 벽에 붙이라고 하는 거여. 손목이 묶여 있응께 중심잡기도 힘든디, 넘어지믄 군홧발로 얻어터징께 부들부들 떪시롱 버텨야 했지."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허벅지가 덜덜 떨리고 온몸에 힘이 없었다. 전씨는 이튿날인 21일 탑차에 실려 광주교도소로 이송됐다.

광주교도소로 가는 길도 험난했다. 차량이 출발하기 직전 군인 한명이 차 안에 최루탄을 던졌다. '피직'하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가스가 뿜어나왔다. 손이 묶인 사람들은 서로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차량 뒤편에 몇 개의 구멍이 보였다. 전씨도 발버둥 치며 구멍에 코와 입을 갖다 댔다.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고 침이 줄줄 흘렀다.

"나야 덩치가 좋으니까 살았제, 힘없고 마른 사람은 막 밟혀 죽고 그랬어. 이 새끼들이 일부러 뺑 돌아서 가는 건지 정말 죽을 것 같더라고, 불구덩이에 갇힌 것 같았제…. 헌데 그 와중에도 밖에선 총소리가 빵빵 들렸어. 그날이 21일이야."

광주교도소에서 조서를 쓰고 상무대 영창으로 이감됐다. 상무대 영창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매일 폭행과 구타, 폭언이 이어졌다.

전씨는 아직도 고통스러운 영창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물 한모금도 자유롭게 마시지 못했다. 사람들은 고무신에 오줌을 따라 마시기도 했다. 한참을 맞던 사람이 꿈틀대지 않으면 군인들은 주전자로 뜨거운 물을 뿌려 보거나 워커로 가슴팍을 밟아봤다.

지옥 같던 시간은 16일 만에 끝났다. 택시부대 선발대의 운전석이 아닌 조수석에 앉았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상무대 영창에서 나오던 날, 전씨 아버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들이 아버지를 호출했다. 전씨와 아버지는 한 사무실로 끌려갔고 그곳엔 공수부대원 한명이 있었다. 공수부대원이 먼저 칠판에 글을 쓰면 아버지와 전씨는 종이에 똑같은 내용을 따라 썼다.

'상무대 안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전부 잊고 조용히 살겠다. 외부에 절대 발설하지 않으며 병원에도 가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집에 오자 전씨는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앞뒤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피에 절어있었다. 어머니는 아무리 빨아도 핏물이 빠지지 않는다며 수백번 비누칠하다 소리 내 울었다.

당시 일흔 살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곡소리를 듣고 "일본 놈들보다 더해. 6·25 때보다도 잔인한 놈들"이라고 혀를 찼다.

 

 

 

 

 

 

 

 

 

지난달 31일 오후 광주 북구 용봉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5·18 유공자 전종태씨(66)가 자신의 집을 살펴보고 있다. 2022.1.1/뉴스1

 

 


그날 이후 전씨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군인들 몰래 아는 의사를 찾아갔다. 두들겨 맞은 무릎에 물이 찼다고 했다. 물을 잔뜩 뺀 뒤에도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발바닥은 신경이 죽어서 감각을 잃었다. 땅을 걸으면 스펀지를 밟는 듯했고 중심을 잃고 쉽게 넘어지곤 했다. 벌이가 좋은 자동차 정비 일도 다시는 하지 못했다.

잠을 자면 최루가스가 가득한 탑차에 탄 꿈을 꿨다. 불구덩이 같은 그곳에서 살기 위해 동지들을 밟았고 '악'하는 비명이 들렸다. 꿈에선 아무리 달려도 구멍에 닿을 수 없었다. 눈을 뜨면 숨을 캑캑 몰아쉬었다.

1990년 국가 보상금을 받으려고 신청했다. 보상에 앞서 장애등급 산정에서는 외과와 정신과 치료 기록이 인정돼 '장애 12등급'을 받았다. 보상금으로 6000만원을 받았다. 전씨는 십 수년간 자신 대신 부모를 챙긴 형제들에게 보상금을 나눠줬다.

2013년 광주 트라우마센터 설립 후 치료를 받으러 그곳을 찾았다. 자꾸 5·18 이야기를 꺼내는 의사가 미웠다.

말을 하고 털어내야 고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정신이 도는 듯한 느낌에 '왜 자꾸 나쁜 기억을 묻냐'며 소리를 된통 지르고 다신 센터를 찾지 않았다.

차라리 묻지 않고 약만 내주는 정신병원이 나았다. 치료를 받는다고 약을 먹다 보니 기억이 '깜빡깜빡한다'고 했다.

고구마를 굽겠다고 불에 냄비를 올려놓고 까먹고 잔 적도 있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부엌 한쪽이 새카맸다. '이게 뭔 일이야?'하고 30분을 고민한 끝에 고구마가 떠올랐다.

한 열흘쯤 지났을까. 여전히 남아있는 탄내에 또 한 번 머리를 굴렸다. '왜 탄내가 나지?' 이번엔 1시간을 고민한 끝에야 고구마를 기억해냈다고 한다. 그 후로 전씨는 모든 일을 다 기록한다.

"기억이 깜빡깜빡혀. 오늘도 기자님 온다는 거 잊을까 봐 여기저기 다 적어놨제. 허허, 근데 웃긴 것은 그날 기억은 생생혀. 오일팔은 어제 같어."

인터뷰를 시작할 때쯤 전씨가 건넨 커피가 야외용 테이블에 그대로 있다. 뜨거웠던 커피는 완전히 식어 냉커피처럼 차가웠다.

"2016년도엔가, 보훈처에서 5·18유공자들 집을 싹 고쳐줬어. 그때 물이 샌다고 하니 지붕을 고쳐 줬는데 철판을 덮어준 거여. 물은 안 샌께 좋긴 한디 여름엔 찜통같이 덥고, 겨울엔 얼음이 고 사이로 녹아서 질질 새. 지금은 수도랑 보일러가 다 터져서 이라고 살제."

전씨는 하루라도 따뜻한 집에서 맨발로 잠드는 게 소망이라고 했다.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보일러를 고치고 싶다고 한다.

"추워, 추운께. 많이도 필요 없이 딱, 먹고 자고만 할 수 있음 좋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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