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이 깃든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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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이 깃든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을 찾아서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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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11. 3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이 깃든 곳
광주학생독립운동, 일제강점기 3·1운동, 6·10만세 운동과 3대 민족운동중 하나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계승, 대한민국 민주화의 초석 평가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15]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이 깃든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을 찾아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3·1운동, 6·10만세 운동과 3대 민족운동의 하나이며,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계승, 대한민국 민주화의 초석이 마련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이 깃든 곳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적 사료를 보관 ‧ 전시하여 당시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곳이다.

1층 참배실은 광주 학생 독립유공자 279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2층은 영상시설과 각종 자료를 전시해 놓은 공간으로써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하여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기념탑으로 올라가는 ‘113계단’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인 11월 3일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광주 학생운동기념탑은 광주 학생들의 불타오르는 항일 정신을 횃불로 형상화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록화/기념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록화/기념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이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항일학생운동으로, 일제 치하의 어둠 속에서 항일투쟁의 돌파구를 찾고 있던 서울, 평양 등 전국 각지의 학생과 민중들이 광주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일제에 저항한 항일 학생 독립운동이다.

이 운동은 전국 320개교에서 5만 4천여 명의 학생이 참가하여 5개월 동안 계속되었으며 해외로까지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미주, 일본까지 퍼져 나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역사는 이 사건을 3·1운동, 6·10만세 운동을 계승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민족독립 운동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식민지로 전락한 약소국가 중 유일하게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대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1910년대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1910년대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식민통치

1910년대 일제는 무단통치를 통해 헌병 경찰의 즉결처분권과 태형령 등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토지조사와 회사령을 공포하여 토지약탈과 우리의 민족자본 성장을 억압했다.

1919년 3·1운동이 보여준 우리 민족의 저력을 두려워한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기만적인 술책으로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이광수를 비롯하여 최남선, 최린, 송진우, 김성수 등 친일파를 양성하여 민족을 분열시켰으며,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사회주의자와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다.

칼과 제복을 착용한 일본인 교사(1910년대) [정성환 기자]
칼과 제복을 착용한 일본인 교사(1910년대)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우리 농민은 전 농토의 46%를 강제로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으며 산미 증식 계획을 통해 우리 농민이 피땀 흘려 지은 쌀 대부분을 일본으로 가져가 그들은 쌀밥을 배불리 먹었지만, 우리 민족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굶주림에 시달렸다.

1920년대 곡창지대인 나주·영산포의 1인당 토지 소유현황을 보면 조선인은 1,800평, 일본인은 51,500평으로 모든 토지를 일제에 빼앗겼다.

그 당시 나주지역의 대지주 일본인 ‘구로즈미’는 전남대학교의 11배가 넘는 330만 평의 토지를 착취했다. 이처럼 수많은 농민은 땅을 잃거나 경작권을 빼앗긴 채 소작농, 노동자, 화전민으로 전락했고, 40만여 명의 농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해야만 했다.

또 한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통해 조선의 민족교육을 탄압했다. 교원들은 칼과 제복을 착용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선인을 우민화하기 위해 수준 높은 교육을 제한하고 저급한 수준의 초등·기술 교육만 가르쳐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지적능력을 차단했으며, 보통학교 수업연한을 한국인 4년, 일본인 6년으로 차별적인 식민교육을 단행했다.

광주고보 맹휴 사건 공판광경 [정성환 기자]
광주고보 맹휴 사건 공판광경 [정성환 기자]

△동맹휴학 투쟁(맹휴투쟁)

1920년대 광주지역 학생들의 강렬한 항일 저항운동은 ‘동맹휴학 투쟁(맹휴투쟁)’으로 나타났다.

맹휴투쟁은 학교 당국의 비교육적 처사와 사회, 국가, 민족적 불의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으로 등교 및 수업을 거부하는 투쟁방식이다.

1926년 6·10 학생 만세운동 이전의 동맹휴학은 학원 내의 사소한 문제로부터 발단이 되어 일제 식민지 노예교육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6·10 학생 만세운동을 계기로 총독부 정책에 대한 비판의식이 확대되어 동맹휴학, 수업거부 등의 방법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민족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투쟁으로 승화되었다.

1928년 6월 광주고보 이경채 학생의 격문 살포 사건으로 촉발된 맹휴투쟁은 조직적인 항일 저항운동이었다.

광주고보 5학년 이경채는 친구들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선언서와 격문을 만들어 송정리 일대와 신사에 부착하고, 중학교와 경찰서에 보낸 혐의로 체포되어 구속되자 광주고보 교장 ‘시라이’는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경채를 퇴학시켜버렸다.

이에 학생들은 이경채의 퇴학 사유 해명을 요구하며 맹휴투쟁에 돌입했고 광주농업학교에서도 광주고보를 지원하기 위해 맹휴투쟁에 동참했다.

일제 강점기 광주형무소/수감된 학생들에게 협박, 구타, 전기고문 등 만행을 저질렀다. [정성환 기자]
일제 강점기 광주형무소/수감된 학생들에게 협박, 구타, 전기고문 등 만행을 저질렀다. [정성환 기자]

학생들의 이와 같은 투쟁은 ‘성진회’ 등 학생 비밀결사 조직을 통한 통일적인 지도부의 역할과 민족차별과 식민지 교육 비판에서 벗어나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부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으로 발전했기에 가능했지만 결국, 16명이 징역형을 선고받고 40여 명이 퇴학, 300여 명이 무기정학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학생들의 맹휴투쟁은 실패하거나 끝난 것은 아니었다.

국내‧외에서 독립활동하고 있던 졸업생, 일반 시민까지 투쟁에 동참하면서 항일 민족의식은 더욱더 견고해졌다.

광주고보 졸업생 장재성은 일본유학 중 귀국하여 ‘맹휴중앙본부’를 결성하여 동맹휴학을 지도했고 이후 ‘독서회중앙부’를 결성하고 학교별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통일적인 지도부를 구성하여 항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신사참배 광경 [정성환 기자]
신사참배 광경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대적 배경

1917년 러시아혁명의 성공으로 전 세계로 전파된 사회주의 사상은 한국의 청년학생과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레닌은 사회주의는 완전한 민주주의이므로 어떠한 억압과 착취도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제국주의의 전쟁과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고 식민지 해방운동 지원을 선언했다.

이러한 레닌의 사상은 조선의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조선의 지식인과 독립운동가, 학생들에게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 당시 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모르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교와 처세의 상식으로 불릴 만큼 사회주의 사상은 인기가 많았다.

1917년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는 당시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약소민족들에게는 커다란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사상적 근거가 되었으며 3·1운동도 그러한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918년 1차 세계대전 후 독일, 터키 등 패전국의 세력을 악화시키기 위해 그 식민지를 해방하는 것이었으므로 전승국의 편에 섰던 일본의 지배를 받아온 우리나라와는 무관했으나 약소국의 해방이라는 희망을 품기엔 충분했다. 

3·1운동/유관순 열사(AI 복원 사진) [정성환기자]
3·1운동/유관순 열사(AI 복원 사진) [정성환기자]

당시 사회주의 사상은 식민지 지배하에 있는 약소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는 희망을 주었으며, 특히 한국의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은 민족해방을 위해 사회주의 사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광주에서도 성진회, 독서회 등 조직화 된 학생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사회주의 학생단체인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의 영향을 받아 항일의식을 키워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6·10 만세운동, 순종의 상여(왼쪽)/6·10 만세운동 재판 광경, 용수를 쓰고 있는 애국지사(오른쪽) [정성환 기자]

우리나라는 1919년 3.1운동 이후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국내에서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절대군주제를 지양하고 민주 공화정을 지지하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대중적 민주주의 출발점이 되었다.

1926년 6.10 만세운동은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민족통합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1927년 민족 최대규모인 좌·우 합작 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학생운동은 커다란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신간회 학생부가 조직되고 이 학생부를 매개로 ‘조선학생회’ 등 민족주의 경향의 학생단체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사회주의 경향의 학생단체들이 협동전선을 펴면서 일제에 항거하는 조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학생들은 일제의 교육적 차별과 식민지배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동맹휴학 등을 강행하며 일제의 강압 정치에 맞섰다.

광주에서도 왕재일과 장재성 등 학생들이 성진회와 독서회 등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을 키워나갔고 투쟁방법도 학내문제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투쟁에서 민족적 분노에 기초한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항일 독립운동투쟁으로 확대 발전했다.
 

신간회 창립 기념사진/1927년/조선일보 보도기사 [정성환 기자]

△광주 학생 비밀결사조직

1920년대 초반 한국의 학생운동은 주로 학내문제에 국한된 동맹휴학의 형태로 진행됐다.

이후 6·10 만세운동을 계기로 조직적인 학생 비밀결사조직이 결성되어 조선인을 위한 교육, 일본인과의 차별 교육 철폐, 일제 타도 등 민족운동의 성격으로 진전됐다.

이런 가운데 광주지역에서는 학생 비밀결사인 ‘성진회’를 시작으로 ‘독서회’ ‘소녀회’ 등 비밀결사 조직을 통해 사회과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항일독립 의지를 키워나갔다.

일제강점기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던 학생들은 일제의 경제 침탈을 눈으로 보고 성장하면서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자각하고,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독립의식을 키워나갔으며, 이러한 의식은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과 잦은 충돌로 표출되었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성진회 회원 [정성환 기자]
성진회 회원 [정성환 기자]

△성진회
<성진회>는 광주지역 최초의 학생 비밀결사조직으로, 광주고보 4학년 ‘왕재일’(22세) 학생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왕재일은 광주고보 학생으로 ‘송홍’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항일 정신을 키워나갔다.

당시 송홍 선생은 광주고보 한문 교사였다. 그는 수업 도중 일본인 몰래 틈틈이 우리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역사에 대한 이해와 민족의식이 성장했고 특히 왕재일은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흉계에 분노했다.

1926년 11월 3일 장재성, 왕재일, 박인생 등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 16명이 주축이 되어 광주지역 최초 학생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성진회’는 깨달아 나아가자‘는 의미이다.

이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회원들을 모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이에 자극받은 뜻있는 학생들이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결성된 지 5개월만인 1927년 3월 왕재일, 장재성, 박인생 등이 졸업을 하고 회원인 채영석의 친형이 광주경찰서 순사부장이었기에 비밀유지를 위해 자진해산 할 수밖에 없었다.

성진회의 큰 의미는 조직을 결성한 지 3개월 만에 해산되었으나 회원들은 또다시 <독서회>라는 방식으로 비밀 연대를 구축 하여 향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독서회 지도부 [정성환 기자]
독서회 지도부 [정성환 기자]

△독서회

1920년대 광주지역의 학생층은 강렬한 항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민족차별과 식민지 교육 비판에서 벗어나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부하고 민족의 독립을 명확히 주장하며 전국적 반제국주의 항일투쟁으로 발전했다.

장재성은 1929년 일본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독서회중앙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 광주여고보 학생들을 결집하여 ‘독서회’를 결성했다.

독서회는 민족문화와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 시켜 학생들을 통솔하고 지도하는 조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1929년 6월에 결성된 독서회는 장기간 유지되지 못하고 결성된 지 3개월 만에 장재성의 밀명으로 해산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 민족의 해방과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려는 독서회원들의 강한 조직력은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광주여고보 독서회(소녀회) 지도부 [정성환 기자]
광주여고보 독서회(소녀회) 지도부 [정성환 기자]

△소녀회
‘소녀회’도 광주여고보 비밀결사조직으로써 독서회원인 장재성의 누이동생 장매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소녀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찰들이 시위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등에 분필로 동그라미 표시를 하면 물수건으로 분필 자국을 지워버려 일본 경찰이 시위 학생들을 분별할 수 없게 훼방을 놓았으며, 시위 남학생들에게 치마에 돌을 날라 건네주었다. 상처가 난 학생들에게 약을 발라주고 붕대로 감싸주며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나주역 광주여고보 여학생 희롱사건의 모형도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생 요인

당시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던 학생들은 일제의 경제 침탈로 고통받는 농민들을 직접 보고 성장하면서 식민지 사회의 억울함을 자각하고,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독립의식을 키워나갔으며, 이러한 피해의식은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과 잦은 충돌로 표출되었다.

당시 광주에서도 열차로 통학하는 한·일 학생들 간에는 수시로 충돌이 발생했으나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은 한국 학생들이 일본 학생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나주역 여학생 희롱사건의 피해자/(왼쪽)박기옥, (오른쪽)이광춘 [정성환 기자]
나주역 여학생 희롱사건의 피해자/(왼쪽)박기옥, (오른쪽)이광춘 [정성환 기자]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어난 일본 학생들과의 집단 패싸움은 두 가지 요인으로 요약된다.

하나는 광주역을 출발해 나주역에 도착한 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 ‘후쿠다 슈조’가 한국인 여학생 박기옥의 댕기 머리를 잡고 희롱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일본 남학생이 장난을 치면서 한국인 여학생을 밀치면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본 박기옥의 사촌 동생인 광주고보 학생 ‘박준채’와 일본인 학생 ‘후쿠다’와 싸움이 한·일 학생들 간 집단충돌로 이어졌으며, 이 충돌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 편을 들고 광주고보 박준채 학생을 구타함으로써 학생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 한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려야 할 기자 등이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을 편들고 나서면서 조선 학생들은 억울하게 가해자로 낙인찍혔고, 이로 인해 조선 학생들은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로 가득 차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처럼 충돌의 위험을 항상 안고 있었다.

나주역 여학생 희롱사건으로 발생한 한일 학생 간의 충돌은 이러한 배경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후 경찰과 교사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한·일 학생들의 감정은 계속 이어져 오다 마침내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폭발한 것이다. 

시위노선도/1차시위(왼쪽), 2차시위(오른쪽) [정성환 기자]
시위노선도/1차시위(왼쪽), 2차시위(오른쪽)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 전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1월 3일과 11월 12일 두 차례 있었다. 제1차 시위는 ‘최쌍현 피습사건’과 ‘광주역 충돌사건’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2차 시위는 장재성의 주도 아래 독서회원들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되었다.

11월 3일은 개천절이면서 ‘성진회’ 창립 3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일본 왕의 생일인 ‘명치절’이었다. 또 한 누에고치 6만 섬 생산을 축하하는 날이기도 해 광주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학생시위 광경/(왼쪽)광주고보, (왼쪽)광주농고 [정성환 기자]

그런데 이날 오전, 신사참배를 하고 귀가하던 일본 학생 ‘사이토’가 조선 학생 ‘최쌍현’의 얼굴을 단도로 찌르는 테러 사건이 발생하면서 한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 간에 집단 패싸움이 일어나 대규모 시위로 폭발하면서,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를 비롯해 광주지역 학생들은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일본 학생들과의 충돌사건을 왜곡·편파 보도한 광주일보를 습격했고, 수백 명씩 떼 지어 몰려나온 일본 학생들과 난투극을 벌였다.

민족차별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투쟁은 군중과 함께 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일본 경찰 및 소방대와 충돌했다. ‘조선독립 만세’ ‘식민지 노예교육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록화/기념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록화/기념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시위대열은 상급생들이 앞장서고 하급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시민들은 각목이나 장작을 가져다주며 환호했고, 어떤 사람은 팔려고 사다 놓은 지팡이를 건네주기도 했다.

호떡 장사를 하던 아저씨는 가난했음에도 호떡을 가득 담아와 나누어 주었으며 감을 파는 사람은 감을, 떡을 파는 사람은 떡을 나누어주며 학생들의 의로운 거사를 성원했다.

여학생들은 치마에 돌을 담아 시위 학생들에게 건네주었고 부상자를 치료했다. 이처럼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일제에 항거했다. 

학생시위 광경/(왼쪽)광주여고보, (오른쪽)수피아여학교 [정성환 기자]
학생시위 광경/(왼쪽)광주여고보, (오른쪽)수피아여학교 [정성환 기자]

학생시위가 끝난 저녁부터 일본 경찰은 70여 명의 한국인 학생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일본인 학생들은 겨우 7명을 체포하여 곧바로 훈방으로 석방했다. 이 편파적인 조치는 학생들을 분노케 했으며, 신간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실을 전국에 알려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광주에 진상조사단과 김병로 변호사 등을 급파하여 경찰과 관계기관의 만행에 항의했다.

당시 신문은 “시위행렬에 참여한 사람이 3만여 명에 이르렀고 전시상태를 방불케 해 일본인들은 자취를 감추었다”라고 보도했으며, 11월 3일 학생시위를 “10년 전, 3·1운동 이후 처음 보는 큰 사건”으로 대서특필했다.

총독부는 여론의 심각성을 의식해 보도를 금지하고 휴교령을 내리고 편지를 통한 연락까지도 엄중히 감시했다. 그렇지만 일제의 이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광주 학생시위 소식은 갖가지 유언비어가 난무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퍼지기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광주역 집단충돌 현장 모형도/기념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광주역 집단충돌 현장 모형도/기념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1차 시위의 성과로 용기를 얻은 학생투쟁지도본부는 2차 시위를 결정하고 전남 청년연맨 집행위원장 ‘장석천’은 전국 학생지도를, 전남 청년연맹 학생부 책임자 ‘장재성’은 광주 학생지도를 맡기로 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저항운동은 맹휴투쟁을 넘어서 민족의 해방과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를 주장하는 집단적인 거리 투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1차 시위운동을 주도했던 남학생과 신간회 등 핵심 인물들이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으나, 장재성은 각 학교 내의 <독서회>를 기반으로 여학생 조직과 여성단체인 근우회를 결집하여 광주 장날인 11월 12일 오전 9시 첫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제2차 시위를 감행했다.

“철창에서 신음하는 교우를 구하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격문을 살포하며 학우들이 수감 되어있는 광주형무소로 진격했다. 그러나 트럭과 물대포까지 동원한 대규모의 일본 경찰에 의해 저지당하고 학생시위는 강제해산을 당하게 된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전국 확산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 전국 확산 [정성환 기자]

2차 시위는 학생투쟁지도본부가 결성되어 장재성의 지도로 조직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일제 무장 경찰의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맹휴투쟁과 비밀결사 활동을 통해 축적되어 온 학생운동의 조직적인 역량 때문이었다.

이제 학생운동은 단순한 집단적 거리 투쟁의 단계를 넘어 목적의식이 뚜렷한 정치투쟁, 대중투쟁으로 발전했으며 그것은 전국적인 항일민족운동으로 확대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2차 시위가 끝나자마자 일본 경찰은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나섰다.

학생들은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과 탄압에 시달렸으며 학생들의 비밀장소인 ‘장재성 빵집’에서 독서회 등 학생 비밀결사 회원들의 명부가 발견되어 시위 주동자들이 체포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신문 보도를 금지하고 휴교령을 내렸다.

남아 있는 학생들은 백지동맹으로 항거했으며, 광주고보 학생들은 3차 시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무더기로 퇴학을 당했다.

광주지방법원/1930년 2월 12일 광주학생사건 첫 공판이 열린 곳이다. [정성환 기자]
광주지방법원/1930년 2월 12일 광주학생사건 첫 공판이 열린 곳이다. [정성환 기자]

2차 시위에 참여한 학생은 500여 명이었는데 250여 명이 검거되고, 사회·청년 단체 간부들 160여 명도 검거되었다.

1930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학생운동은 전국 320개 학교에서 5만 4천여 명이 참여하였으며, 255명이 구속되고 1,000여 명이 퇴학당했다.

전국적으로는 1,462명 검거되고 3,000여 명이 퇴학 또는 무기정학을 당했다. 주동자 ‘장재성’은 징역 4년, ‘왕재일’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공판광경 보도기사(동아일보 1930.10.28.)/학부형의 암루(暗淚, 남몰래 흘리는 눈물) [정성환 기자]
공판광경 보도기사(동아일보 1930.10.28.)/학부형의 암루(暗淚, 남몰래 흘리는 눈물) [정성환 기자]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 독립운동은 신간회 등 사회 청년 단체 활약으로 목포상업학교를 시작으로 인근 전남지역으로 파급되어 서울 등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이는 학생운동이 사회·민중운동과 결합 되어 전개되었음을 의미한다. 학생들의 투쟁은 국내에 그치지 않고 중국, 일본, 연해주, 미주지역 등 국외로까지 퍼져 명실공히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국외 확산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 국외 확산 [정성환 기자]

‘신간회’는 구금된 학생들의 석방과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대규모 민중대회를 준비했으나 대회 개최 6시간 전, 일본 경찰의 급습으로 지도부를 포함 90여 명이 검거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비록 민중대회는 무산되었지만, ‘신간회’가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매우 컸다.

이후 신간회는 지도부 대거 구속, 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온건 노선에 대한 사회주의 계열의 불만, 민족주의자를 배척하고 강경노선을 주장하는 코민테른 12월 태제의 영향으로 신간회의 기능은 현저히 상실되었다.

결국, 1931년 5월 16일 신간회는 해산되고 일제에 의해 도립사범학교는 폐교되었다.

△광주 학생비밀 결사 조직 ‘성진회’와 ‘독서회’의 주역 왕재일과 장재성 

애국지사 왕재일 (1904∼1961)/전남 구례군 서시천 수석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애국지사 왕재일 (1904∼1961)/전남 구례군 서시천 수석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성진회의 핵심 인물인 왕재일(王在一) 선생은 전남 구례군 광의면 출신으로 호는 호산(壺山), 본관은 개성이다.

광주고보 재학생 장재성(張載性) 등과 비밀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했다.

집안이 가난했던 그는 구례에서 광주에 올라와 흥학관(興學館)에서 신문 배달로 숙식하며 광주고보를 다니면서 신문물을 배우고 사회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26년 11월 3일 장재성 등 16명이 모여 광주 최초 학생 비밀결사조직인 성진회를 결성했다.

1927년 학업을 마치고 농촌계몽에 뜻을 두고서 강진에 내려가 동아일보사 강진지국을 개설하고 강진과 장흥을 중심으로 청년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연루되어 1년 6개월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으나 1932년 전남사회운동협의회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2년간 투옥되었다. 

왕재일 선생 장래식/왕재일 선생 운명기사 [정성환 기자]
왕재일 선생 장래식/왕재일 선생 운명기사 [정성환 기자]

해방 후 1947년에는 동광 신문 편집부 차장으로 근무했으며, 6‧25동란 때는 인민군에게 납치되었다 탈출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전라남도사(全羅南道社)와 광주시보(光州市報)에서 근무했으며 『호남절의사(湖南節義史)』, 『전남자치사년지(全南自治四年誌)』를 편찬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그는 1960년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식은 광주서중·일고 동창회의 주도로 광주일고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앞에서 거행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독립유공자 표창장을 추서하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995년에는 대전 국립묘지의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장재성(1908~1950)/장재성 선생 상,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 역사관 소재 [정성환 기자]
장재성(1908~1950)/장재성 선생 상,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 역사관 소재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 장재성 선생은 광주에서 태어났다.

항일 학생 비밀결사 단체인 성진회와 독서회를 조직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였으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는데 헌신했다.

광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광주고보 학생들이 맹휴투쟁을 일으키자 귀국하여 독서회중앙부를 결성했다.

학교별로 분산되어 있던 학생조직을 ‘독서회’로 개편하여 광주학생운동을 지도하다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징역 4년의 옥고를 치렀다.

1937년 일본유학 중 ‘신흥과학연구회’에서 활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을 맡으면서 1948년 황해도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는 등 남·북분단을 반대하면서 세 차례 북을 오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재성 선생은 후퇴하는 국군에 의해 1950년 7월 무등산으로 끌려가 정치범이란 이유로 총살당했다.

3·1운동, 6·10 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으로 평가받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 선생의 최후는 이처럼 비참했다.

가족들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고 그는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사회주의라라는 이유로 독립유공자포상대상자에서 제외됐다.

해방 정국이 불러온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남·북 분단을 극복하려 했던 장재성 선생의 뜻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도 오늘을 살아가는 후손들의 책무라 생각한다.

참배실 [정성환 기자]
참배실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의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약소 식민국가 중 일제에 항거한 세계 유일의 항일독립운동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6.10 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이라 불렸으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은 4·19혁명과 광주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군부 독재정권을 종식 시키는 거대한 힘으로 작용했다.

해방 이후 정부는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희생된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53년 이승만 정권 때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했으나 5.16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는 학생들의 데모가 두려워 ‘학생의 날’을 폐지했다.

이후 5.17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에 의해 ‘학생의 날’이 부활 되었으나 기념일은 유명무실했고, 노무현 정부 때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을 변경하여 교육부 주관으로 기념식을 거행해오다가 문재인 정부 때 교육부와 국가보훈처가 공동으로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개최하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정성환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정성환 기자]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학생독립운동기념탑’은 광주 학생운동기념관, 광주일고, 광주자연과학고, 전남여고, 광주교대, 경북사범대학교에 세워져 그날의 의로움을 기념하고 있다.
우리 후손들은 일제강점기 때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로 분연히 일어섰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잊지말고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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