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하서 '김인후'선생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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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하서 '김인후'선생의 「생애와 사상」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1.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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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장성의 신동으로 기록
영남엔 퇴계 '이황'...호남엔 하서 ’김인후‘ 명성
충(忠)과 의(義)를 실천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 칭송
장성 ‘하서대로’ 광주시 ‘하서로’...김인후 선생 호 지명 사용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11 = 이번 이야기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 하서 '김인후'선생의 인생을 뒤좇는 「생애와 사상」편이다.

하서 김인후 선생 동상/광주광역시 북구 중외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하서 김인후 선생 동상/광주광역시 북구 중외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51세) 선생의 생애와 사상

하서 김인후 선생의 5대조인 ‘김온’은 조선 개국공신이었으나 정부인 여흥 민씨의 친가가 태종(이방원)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제거할 때 화를 당하자, 세 아들을 데리고 전라도 장성현(현, 장성군 황룡면 맥동마을)에 정착하면서 가문이 융성했다고 한다.

백화정(百花亭)/하서 김인후 선생 생가 [정성환 기자]
백화정(百花亭)/하서 김인후 선생 생가 [정성환 기자]
문정공하서김선생유허비(文正公河西金先生遺墟碑)/장성군 황룡면 맥동마을 소재 [정성환 기자]
문정공하서김선생유허비(文正公河西金先生遺墟碑)/장성군 황룡면 맥동마을 소재 [정성환 기자]

 

어사리(御賜梨)=임금이 하사한 배나무 [정성환 기자]
어사리(御賜梨)=임금이 하사한 배나무 [정성환 기자]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1510~1560) 선생은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리(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에서 참봉 김령과 옥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 본관은 울산이다.

맥동마을 입구에는 하서 선생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으며 생가인 ‘백화정’에는 어사리(御賜梨)가 있다. ‘어사리’는 임금이 하사한 배나무라는 뜻으로, 인종 임금이 세자시절 하서 선생에게 하사한 ‘배’를 고향 부모님께 드렸는데 그 씨도 아까워 대나무 숲 아래에 심었다고 한다.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열매를 맺으니, 보는 사람마다 하서 선생의 인종에 대한 충성과 지극한 효심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한다.

붓바위 [정성환 기자]
붓바위 [정성환 기자]

맥동마을 입구 산자락에는 필암(筆巖)이라 새겨진 신비스런 ‘붓바위’가 있다.

‘붓바위’는 붓처럼 생겨 ‘필암’이라 했다고 한다. 풍수지리학에서는 터를 잡은 곳에 붓 모양의 산이나 바위가 있으면 대학자가 난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필암’과 인연을 맺은 대학자를 ‘하서 김인후’로 믿고 있으며 ‘필암서원’은 이 ‘붓바위’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명종실록」에 따르면 ‘하서’ 선생은 “5~6세 때에 문자를 터득해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술과 시를 좋아했고, 마음이 관대해 남들과 다투지 아니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서’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5세에 천자문을 이미 통달하고 ‘우주는 넓고 넓어 큰사람이 산다’라고 말할 만큼 시문에 뛰어나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6세 때 “하늘의 모양은 둥글고도 무척 크고, 또 지극히 거무스레 아득하구나.

넓고 텅 빈 것이 땅의 주변을 둘렀도다.

덮이어 있는 그 가운데 만물이 다 들어가는데, 중국 기(杞) 나라 사람은 어찌하여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던고”라는 ‘영천시(詠天詩)’를 지어 우주의 이치뿐만 아닌 기우(杞憂)의 고사까지도 터득한 ‘장성의 신동’이었다고 한다.

복재 ‘기준’이 ‘하서’ 선생에게 선물한 붓 [정성환 기자]
복재 ‘기준’이 ‘하서’ 선생에게 선물한 붓 [정성환 기자]

‘하서’ 선생은 8세 때 전라도 관찰사로부터 ‘장성 신동 천하 문장’이라는 칭찬을 받았으며, ‘고봉 기대승’의 삼촌인 ‘복재 기준’은 아홉 살이던 ‘하서’를 만나 장차 세자(인종)의 신하가 되겠다고 예견하며 붓 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복재 ‘기준’은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도학 정치를 주장하다가 서른 살의 나이에 죽임을 당한 ‘기묘명현’이다. 그의 사촌 동생이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친 고봉 ‘기대승’으로 ‘하서’ 선생과 학문적인 관계를 맺으며 ‘하서’의 손자 ‘남중’을 사위로 삼았다.

10세 때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이 ‘소학’을 가르치고 “이는 나의 어린 벗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하니 그의 총명함이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이 가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서(河西) 선생이 초서로 쓴 천자문(千字文). 하서’ 선생은 조선 서예계에 명대의 ‘초서풍’을 수용하여 조선의 개성적인 ‘초서풍’을 발전시켰다. [정성환 기자]
하서(河西) 선생이 초서로 쓴 천자문(千字文). 하서’ 선생은 조선 서예계에 명대의 ‘초서풍’을 수용하여 조선의 개성적인 ‘초서풍’을 발전시켰다. [정성환 기자]

‘하서’ 선생은 18세가 되던 해에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신재 ‘최산두’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으며, 광주에 귀향한 ‘박상’을 찾아가 학문의 폭을 넓혀 사서오경, 천문, 지리 등에 능통했다고 한다.

‘시경’을 탐독하고 성리학에 통달했던 ‘하서’ 선생은 22세던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퇴계 ‘이황’, 미암 ‘유희춘’ 등과 깊은 친교를 맺었는데 ‘이황’은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김인후’ 한 사람뿐이다”라고 할 만큼 ‘하서’ 선생에게 돈독한 우의를 표했다고 한다.

16세기는 조선의 조정은 사림파가 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네 차례의 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 등 많은 신진 사림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만, 사림이 성장하면서 중앙정치에 등장한 것은 시대의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하서’ 선생의 등장은 젊은 지식인에게 희망의 등불이었다.

당시 ‘영남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호남에 하서 ’김인후‘가 있다’라고 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기대승과 정철 등 호남 출신 학자가 그의 제자임을 자처한 것에서도 ‘하서’ 선생이 16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원장선생안(院長先生案)/보물 제587호/국립 광주박물관 소장. 필암서원 원장을 역임한 동춘당 ‘송준길’ 등 9명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것이다. [정성환 기자]
원장선생안(院長先生案)/보물 제587호/국립 광주박물관 소장. 필암서원 원장을 역임한 동춘당 ‘송준길’ 등 9명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것이다. [정성환 기자]

‘하서’ 선생은 1540년(31세) 별시 문과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1541년(32세)에는 독서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만큼 그의 학문은 깊었다.

봉심록(奉審錄)/보물 제587호/국립광주박물관 소장 [정성환 기자]
봉심록(奉審錄)/보물 제587호/국립광주박물관 소장 [정성환 기자]

조선의 12대 왕 인종(1515~1545년)은 재위 기간이 8개월로 조선의 임금 중 가장 짧은 왕이다.

인종은 1515년 2월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25년간 왕세자 생활을 하다가 1544년 중종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인종은 세자시절 신진 사림과 가까이 지냈는데, 세자(인종)의 스승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년)와는 가장 친분이 두터웠다.

‘인종’이 세자로 있던 1543년(중종 38, 34세) ‘하서’ 선생은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 보도(輔導)로 임명된다.

‘세자시강원’은 세자에게 학문을 강학하는 곳이며, 보도(輔導)란 지금의 스승을 말한다.

세자(인종)는 하서의 학문과 도덕의 훌륭함을 알고 정성껏 공경의 예로 대하고 믿고 따랐다.

‘하서’ 역시 세자(인종)의 덕(德)이 뛰어나 성군(聖君)으로서 인품이 타고났기에 후일 요·순 시대의 ‘덕치’를 펼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정성껏 보필했다.

이처럼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은 믿음과 충절(忠節)로 승화되었고, 그 증표로 세자는 ‘하서’ 선생에게 직접 그린 ‘묵죽도(墨竹圖)’와 귀중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하사했다.

인종대왕 묵죽도(墨竹圖) [정성환 기자]
인종대왕 묵죽도(墨竹圖) [정성환 기자]

묵죽도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세자는 손수 그린 대나무 그림을 하사하고, 그림에 시를 쓰도록 했다고 한다.

이처럼 인종은 ‘하서’를 신뢰하고 배려했으며, ’하서‘는 인종의 진심 어린 믿음과 사랑에 감복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묵죽도’에 써서 넣고 인종에 대한 충절(忠義)을 표했다.

뿌리·가지·마디·잎이 모두 정미(精微)롭고
석우(石友)의 정신이 그 안에 들어있네.

임금님의 조화(造化)를 바라는 마음 비로소 깨달으니
천지(天地)를 아우르는 뜻 어길 수가 없어라.

신(臣) 김인후(金麟厚)

이 시는 절의(節義)를 상징하는 대나무와 영원히 변치 않은 바위의 조화를 그린 세자의 뜻처럼, ‘하서’ 선생도 세자에게 군신의 절의를 지키며 충성(忠誠)를 다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나 안타깝게 ‘묵죽도’ 진품은 소실되어 전해오지 않고, 현재의 그림은 ’묵죽도‘의 목판본으로 제작한 것으로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노비보(奴婢譜)/보물 제587호 [정성환 기자]
노비보(奴婢譜)/보물 제587호. 필암서원 노비 6명의 가족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서이다. [정성환 기자]

인종과 하서 김인후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543년(중종 38, 34세) ‘하서’는 ‘기묘명현’의 신원을 회복해 줄 것을 문신으로서 최초로 중종 임금에게 상소했으나, 중종은 조광조, 기준 등 신진 사림을 억울하게 죽임으로 몰고 간 당사자였기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뜻을 이루지 못한 ‘하서’ 선생은 대신들과 뜻이 맞지 않아 1543년 12월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세자(인종)의 곁을 떠나, 고향과 가까운 옥과 현감을 자청해 지방으로 내려갔다.

1544년(35세) 중종이 승하하고 즉위한 인종은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 기준 등의 신원을 회복하고 개혁정치를 꿈꾸며, 덕으로써 민본정치를 구현하려 힘썼다.

이러한 인종의 정책은 ‘하서’ 선생과 인종의 생각이 일치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1545년(36세) ‘하서’ 선생은 명나라 사신이 국상 조문을 오자 승문원 제술관(製述官)으로 발탁되어 조정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하서’ 선생이 조정에 있는 동안 ‘인종’은 병이 깊었다.

의술에 능통했던 ‘하서’ 선생은 ‘인종’의 약 처방을 논의할 때 자신이 참여할 것을 청했으나 맡은 임무가 다르다 하여 거절당했다.

울화가 치민 ‘하서’ 선생은 외척인 대윤·소윤의 권력다툼과 부패한 조정을 뒤로하고,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옥과 현감으로 되돌아왔다.

품목(稟目)/보물 제587호. 유림 등이 관아나 향교에 탄원 또는 청원을 할 때사용하는 문서이다. [정성환 기자]
품목(稟目)/보물 제587호. 유림 등이 관아나 향교에 탄원 또는 청원을 할 때사용하는 문서이다. [정성환 기자]

1545년 7월 인종이 승하한다.

인종은 중종의 계비이자 계모인 문정왕후의 권력욕에 시달렸다.

생모 장경왕후를 일주일 만에 여윈 비운의 군주 인종은 자신도 병약하여 성군으로서 포부도 펼쳐 보지 못한 채, 재위 8개월 만인 1545년 7월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야사에는 효심이 깊었던 인종은 계비인 문정왕후를 극진히 효(孝)로 대했으나 문정왕후는 자신이 낳은 왕자(명종)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명종을 몹시 괴롭혔으며, 결국, 인종은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생을 마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가 인종을 독살했다는 ‘독살설’이 나온 배경이다.

유소사(有所思)=님 그리워/광주광역시 북구 중외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유소사(有所思)=님 그리워/광주광역시 북구 중외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인종 승하 이후 왕위는 이복동생인 명종이 계승했고, 12세의 어린 명종을 대신해 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조선의 조정은 외척세력의 부패로 이어졌으며, ‘인종’과 ‘하서’ 선생이 희구했던 성군의 덕치(德治)정치에 의한 태평성대는 멀어져 갔다.

인종이 승하했다는 비보를 접한 ‘하서’ 선생은 통곡의 세월을 보내면서 인종을 그리워하는 사모곡 ‘유소사(有所事)’ 쓴다.

송시열이 지은 김인후 선생의 신도비에는 “7월 인종이 승하하자 김인후는 부음을 받고 놀라 통곡을 하여 거의 기절하였다가 깨어났으며, 이로 인해 병을 얻어 현감의 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에는 감히 묻지도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슬퍼하고 말로 나타내지 않으니, 다만 속으로만 슬퍼하고 사람들이 끝내 알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통곡을 한 곳은 맥동마을 앞 난산(卵山)인데 알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난산에는 통곡비와 난산비가 세워져 있다.

통곡단(痛哭壇) [정성환 기자]
통곡단(痛哭壇) [정성환 기자]

김인후 선생은 매년 인종의 기일인 7월 1일 집 앞에 있는 난산(卵山)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종일토록 통곡했다고 한다.

김인후 선생의 이 같은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단이 통곡단(痛哭壇)이다.

난산비(卵山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1호 [정성환 기자]
난산비(卵山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1호 [정성환 기자]

김인후 선생이 인종이 승하하자 난산에 올라 슬퍼하며 통곡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난산비(卵山碑)가 통곡단 가는 길에 세워졌다고 하니, ‘하서’ 선생이 얼마나 ‘인종’ 임금을 사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545년 명종이 11세의 나이로 즉위한 직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하고, 김인후 선생은 1546년 37세로 옥과 현감을 끝으로 관직 생활을 청산한다.

‘명종’은 김인후 선생의 학식과 인품을 중히 여겨 7차례나 관직을 제수하고 출사를 요청했지만, 김인후 선생은 인종에 대한 충성스러운 절개(節槪) 때문에 나아가지 않았다.

오로지 산림에 은둔한 채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송순’의 면앙정과 ‘양산보’의 소쇄원에서 호남의 명사들과 어울려 풍류를 벗 삼아 시문(詩文)을 논했다.

전라도 순창군 쌍치면에는 후학을 양성했던 훈몽재 등 김인후 선생의 흔적이 전해오고 있다.

훈몽재(訓蒙齋)/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소재 [정성환 기자]
훈몽재(訓蒙齋)/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소재 [정성환 기자]
대학암(大學巖)/전북 순창군 쌍치면 소재 [정성환 기자]
대학암(大學巖)/전북 순창군 쌍치면 소재 [정성환 기자]

‘을사사화’가 일어나 사림들이 화를 당한 지 2년이 지나서 또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 젊은 사림들이 억울한 화(禍)를 당하자, 1548년 39세 때 김인후 선생은 처의 고향인 전라도 순창의 ‘점암촌’(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에 은거하며 훈몽재(訓蒙齋)를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송강 정철에게 대학(大學)을 강론하고 자신의 성리학 이론인 도학(道學) 사상을 손수 그림으로 해석한 천명도(天命道)를 완성한다.

지금도 ‘추령천변’(전북 순창 쌍치)에는 대학암(大學巖)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송강 ‘정철’이 김인후 선생에게 대학(大學)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천명도(天命道). 하선(河西) 자신의 도학사상(道學思想)을 손수 그림을 그려 해석했다. [정성환 기자]
천명도(天命道). 하선(河西) 자신의 도학사상(道學思想)을 손수 그림을 그려 해석했다. [정성환 기자]

김인후 선생의 성리학(性理學) 이론은 유학사(儒學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하여,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의 이론에 동조하였으며, 후일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의 4단 7정 논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김인후 선생은 소쇄원 48영’, ‘면앙정 30영’ 등 1,600여 수의 시를 지을 정도로 시문에 능통했으며, 송강 정철, 고암 양자징 등 많은 석학을 배출했다.

소쇄원 48영 편액/소쇄원 제월당 소재 [정성환 기자]
소쇄원 48영 편액/소쇄원 제월당 소재 [정성환 기자]

김인후 선생의 사상은 ‘도학’을 바탕으로 경(敬)의 자세로 의(義)를 실천하여 인격을 완성할 것을 강조했으며, 임금은 왕도(王道)정치를 실현하여 백성이 편안하고 근심이 없도록 민본(民本)정치를 구현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할 것을 주장했다.

이처럼 김인후 선생은 도학을 학문으로 완성하고, 충(忠)과 의(義)를 몸소 실천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서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김인후 선생은 임종 하루 전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유언까지 남겼다고 하니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백이숙제(伯夷叔齊)가 바로 ‘하서 김인후’ 선생이다.

김인후 선생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지 15년여 만인 1560년(명종 15년) 51세에 생을 마감했다.

맥동 마을 ‘원당산’ 묘소 아래에 하서 김인후 선생을 기리기 위한 2개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하서 김인후 선생 묘소 [정성환 기자]
하서 김인후 선생 묘소 [정성환 기자]
신도비(神道碑)/전라남도 기념물 제219호 [정성환 기자]
신도비(神道碑)/전라남도 기념물 제219호 [정성환 기자]

처음 신도비는 1742년에 건립했다.

비문은 1682년(숙종 8년) 우암 송시열이 10년을 걸쳐 지은 명문장으로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하서 김 선생을 태어나게 했고,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쓰여있다.

추기 신도비(追記 神道碑)/1982년 건립. [정성환 기자]
추기 신도비(追記 神道碑)/1982년 건립. [정성환 기자]

‘추기 신도비’는 1982년에 두 번째 건립된 비이다.

이 비는 1796년 정조대왕이 하교한 문묘 배향 및 영의정 증직과 시호 문정(文靖)을 문정(文正)으로 변경한 부분을 새로 새겨 넣어 건립한 것이다.

필암서원 주변 정비 기념비/광풍제월 청수부용(光風霽月 淸水芙容) [정성환 기자]
필암서원 주변 정비 기념비/광풍제월 청수부용(光風霽月 淸水芙容) [정성환 기자]

△ 후대의 평가

정조대왕은 김인후 선생을 문묘에 배향토록 하고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하나라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는 사람은 오직 하서 ‘김인후’ 한 사람뿐이라”라고 했다.

퇴계 이황은 “학문적으로 교유할 수 있는 사람은 ‘하서’뿐이며, 도학과 절의는 비교할 사람이 없다”라고 평가했으며, 율곡 이이는 “하서(河西)는 맑은 물에 핀 연꽃이며 화창한 바람과 비 갠 후의 밝은 달과 같고 나아가고 물러남은 우리나라에 비할 사람이 없다”라고 했다.

우암 송시열은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도학, 절의, 문장을 모두 갖춘 하서 김 선생을 태어나게 하였다”라고 극찬했다.

이같이 김인후 선생은 도학(道學)과 문장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절의(節義)를 지킨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정조 임금이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한다는 교지. [정성환 기자]
정조 임금이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한다는 교지. [정성환 기자]

정통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의 선생의 위상을 다시 한번 끌어올린 인물은 다름 아닌 정조대왕이다.

1796년(정조 20) 김인후 선생 사후 236년 만에 정조 임금은 김인후 선생을 성균관 문묘에 배향케 하고 영의정에 추증했으며, 시호 문정(文靖)을 (文正)으로 고쳐 하사했다고 하니 김인후 선생의 학자적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실록>에는 인종과 김인후 선생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과 신하로서 뜻이 이미 합치돼 동궁에 있을 때부터 신임을 받았고, 은연중에 기약이 이루어져 뜻을 담은 묵화를 직접 하사했다.

다행히도 왕의 교화를 보필하는 적임자가 있어 크게 빛나는 아름다운 정사를 당시에 보게 되리라고 기대했는데,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마침내 지방에서 영영 세상을 떠나고 말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1795년. 정조 20년).

김인후 선생은 인종의 세자시절 스승으로서, 조광조 등 선배 학자들의 성리학 이념을 현실정치에 구현할 것을 희구했다.

그러나 김인후 선생의 학문적 능력은 탁월했으나 인종의 급서로 인해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상실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제자 양성에 힘썼다.

인종이 좀 더 오래 재위해 하서 김인후 선생과 함께 조선왕조를 이끌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서로/광주광역시 북구 광주문화예술회관 [정성환 기자]
하서로/광주광역시 북구 광주문화예술회관 [정성환 기자]

광주광역시와 장성군에는 김인후 선생의 학문과 예술, 충의와 충절을 기리기 위해 김인후 선생의 호를 딴 장성 ‘하서대로’와 광주광역시 ‘하서로’가 있다.

덕(德)과 효(孝)를 겸비한 준비된 성군(聖君) 인종(仁宗)과 함께 조선의 태평성대를 꿈꿨던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 선생은 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하서 김인후 선생의 학문 사상과 충절은 오늘을 살아가는 후세들에게 많은 감화와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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