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유적을 찾아서(2) 「유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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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유적을 찾아서(2) 「유적편」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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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의병장에서 민중의 영웅으로...
장군의 충효 정신이 깃든 유적을 찾아서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5 = 이번 광주 '충장사' 시리즈는 비운의 의병장에서 민중의 영웅으로 되살아난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유적편」이다. 각 처에 살아 숨쉬는 장군의 유적을 찾아 그 유래를 살펴 본다.

「유적편」

충장사 정문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사 정문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사는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위폐와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75년 건립되었으며, 장군의 묘와 가족묘가 조성돼 있다. 충장(忠壯)이란 뜻은 몸을 위태롭게 하여 임금을 받들었기에 충(忠)이라 하고 무(武)에 능하고 몸가짐이 진중하기에 장(壯)이라 했다. 광주의 중심가 충장로(忠壯路)는 김덕령 장군의 시호 충장(忠壯)에서 유래한 도로명이다.

김덕령 장군 생가터(광주시 북구 충효동) / 부조묘(우측) [사진=정성환 기자]
김덕령 장군 생가터(광주시 북구 충효동) / 부조묘(우측) [사진=정성환 기자]

 

부조묘(광주시 북구 충효동) [사진=정성환 기자]
부조묘(광주시 북구 충효동) [사진=정성환 기자]

부조묘(不祧廟) = 이 건물은 충장공 김덕령 장군과 정경부인 흥양이씨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임금의 부조특명(不祧特命)으로 신주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1793년(정조 17) 충효동에 건립되어 있던 것을 2004년 생가터 옆으로 이전했다. ‘부조묘(不祧廟)’는 나라에 공훈을 세운 사람의 신주(神主)를 땅에 묻지 않고 영원히 모시도록 건립한 사당을 말한다.

매년 충장공의 기일인 음력 8월 20일 제사를 모시고 있다.

충효동 정려비각과 왕버들 군(群) (광주시 북구 충효동) [사진=정성환 기자]
충효동 정려비각과 왕버들 군(群) (광주시 북구 충효동) [사진=정성환 기자]

 

충효동 정려비각(1985년 광주시 기념물 제4호) [사진=정성환 기자]
충효동 정려비각(1985년 광주시 기념물 제4호) [사진=정성환 기자]

 

정려비 (광주시 북구 충효동) [사진=정성환 기자]
정려비 (광주시 북구 충효동) [사진=정성환 기자]

정려비(旌閭碑) = 이 비각은 충장공 김덕령(1567~1596) 장군과 그의 부인 흥양이씨, 그의 형 김덕홍, 아우 김덕보의 충(忠) · 효(孝) · 열(㤠)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전공을 세웠으나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옥사하고, 그의 부인 흥양이씨는 정유재란 때 왜적에게 쫓기다 추월산 보리암 근처 절벽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형 김덕홍은 임진왜란 때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했으며, 아우 김덕보는 큰형 김덕홍이 전사하고 작은형 김덕령이 억울하게 옥사하자 세상을 등지고 풍암정에서 은거하였다.

그 후 정묘호란이 발생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환으로 출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정려비는 1789년(정조 13)에 세운 것으로 높이 220cm, 너비 68cm이다. 앞면은 “조선국 증좌찬성충장공김덕령 증정경부인흥양이씨 충효지리”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정헌대부 호조판서 서유린이 짓고 전라도 관찰사 서용보가 쓴 음기가 새겨져 있으며, 김덕령 일가의 애국충절에 대한 찬양과 정조임금이 충효리라고 이름을 지어준 유래가 쓰여있다. 비각은 1792년(정조 16)에 세워졌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비각 전면에는 전주 부윤 ‘한용귀’가 쓴 정조어제윤음(正祖御製綸音)이 있다.

충효동 왕 버들군 (천연기념물 제539호) [사진=정성환 기자]
충효동 왕 버들군 (천연기념물 제539호) [사진=정성환 기자]

충효동 왕버들 군群 =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6호였던 이 나무는 지난 2012년 무등산 주상절리대(천연기념물 제465호)에 이어 천연기념물 제539호로 지정되었다.

왕버들 세 그루의 높이는 10m 안팎이고, 둘레는 8m쯤이며, 수령은 약 430년으로 나타나 1500년대 후반에 비보림(裨補林)으로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버스가 다니는 길이 나기 전에는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소나무 한 그루, 매화 한 그루, 왕버들 다섯 그루가 있었는데, 버스가 다니는 길을 닦으면서, 소나무와 매화나무, 왕버들 두 그루를 베어내 현재는 왕버들 세 그루가 남아 있다. 이 나무는 충효마을의 상징이자 ‘김덕령 나무’라고 불리고 있으며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김덕령 장군의 순절비 (담양 추월산 보리암 입구) [사진=정성환 기자]
김덕령 장군의 순절비 (담양 추월산 보리암 입구) [사진=정성환 기자]

 

정경부인 흥양이씨 순절비 (담양 추월산 보리암 입구) [사진=정성환 기자]
정경부인 흥양이씨 순절비 (담양 추월산 보리암 입구) [사진=정성환 기자]

정경부인 흥양이씨 순절비 = 김덕령 장군의 부인 흥양이씨가 순절했던 곳은 담양 추월산 보리암 근처로 20m가 넘는 낭떠러지다. 정유재란 때인 1596년 9월 15일 담양 왜군들이 추월산 보리암 근처까지 추격해오자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고 전한다.

김덕령 장군 일가의 호패형 순절비 [사진=정성환 기자]
김덕령 장군 일가의 호패형 순절비 [사진=정성환 기자]

김덕령 장군 일가의 호패형 순절비 = 호패형 비석 2기는 정유재란(1596. 9. 15) 흥양이씨 부인과 함께 순절한 큰처남 이인경의 부인 광산김씨, 작은 처남 이원경의 부인 제주양씨, 자형 김응회와 김응회의 어머니 창령 성씨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이다.

원효계곡과 풍암정 [사진=정성환 기자]

 

풍암정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15호) [사진=정성환 기자]
풍암정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사진=정성환 기자]

풍암정(風岩亭) = 풍암 김덕보가 지은 정자이다.

임진왜란 때 큰 형 덕홍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하고, 작은 형 충장공 김덕령이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옥사하자, 세상을 등지고 두 형(덕홍, 덕령)을 기리며 원효계곡에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풍암’이라는 이름은 그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며 건물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2칸으로 팔작기와지붕이다.

풍암정 안에는 ‘풍암정사’ 현판과 풍암기, 그리고 임억령, 고경명, 안방준 등의 시를 새긴 판각이 걸려있다.

원효계곡 [사진=정성환 기자]
원효계곡 [사진=정성환 기자]

원효계곡 = 송강 정철의 넷째아들 정홍명이 지은 「풍암기」를 보면 당시에는 이 지역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명승지이며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기암괴석의 사이마다 100여 주 단풍나무가 끼어있어 흐르는 시냇물 빛이 붉을 정도로 무성하다”라고 하여 이곳의 이름을 풍암(風岩)이라 했다고 전한다.

김덕보는 정묘호란 때 ‘안방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환으로 출정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785년(정조 7) 큰형 김덕홍과 함께 추증되고, 큰형 덕홍과 작은형 충장공 김덕령과 함께 광주 ‘의열사’에 배향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환벽당 (대한민국 명승 제107호)  [사진=정성환 기자]
환벽당 (대한민국 명승 제107호) [사진=정성환 기자]

환벽당(環碧堂) = 조선 중종 때 홍문관 교리와 나주 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1501~1572)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자연을 벗 삼아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별서(別墅) 원림(園林)으로 김덕령 장군이 어릴 때 뛰어놀고 형 덕홍과 함께 글을 배웠던 곳이다.

환벽당은 남향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이다.

환벽(環碧)이란 푸르름이 사방으로 고리를 두른 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의미하는데, 무등산 주변이 온통 푸른 벽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라 하여 당호를 ‘환벽당’이라 지었다고 한다.

당호는 ‘영천자 신잠’이 짓고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으며, 석천 ‘임억령’과 ‘조자이’의 시가 새겨진 편액이 걸려있다. 환벽당 아래 넓은 정원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으며 사촌 김윤제의 집 본채가 있던 곳이라 한다.

당호 '환벽당'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사진=정성환 기자]
당호 '환벽당'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사진=정성환 기자]
석천 임억령 시(좌) / 조자이 시(우) 편액  [사진=정성환 기자]
석천 임억령 시(좌) / 조자이 시(우) 편액 [사진=정성환 기자]

 

환벽당 협문  [사진=정성환 기자]
환벽당 협문 [사진=정성환 기자]

환벽당 협문 = 환벽당 앞에는 무등산 원효계곡의 물이 흐르며 계곡 아래 증암천(창계천) 주변에는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장관을 이뤄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다고 한다.

환벽당 아래 창계천에는 김윤제가 낚시를 즐겼다는 ‘조대(釣臺)’와 그 옆에는 늙은 소나무들이 기울어져 있어서 ‘조대쌍송(釣臺雙松)’이라 불린다. ‘조대’ 앞이 바로 정철이 목욕하다가 김윤제를 만났다는 설화가 깃든 ‘용소’이다. 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250m 떨어진 곳에는 ‘식영정’이 있으며, ‘식영정’은 ‘사촌 김윤제’의 조카인 ‘김성원’이 장인이자 스승인 석천 ‘임억령’에게 지어준 정자라고 한다. 환벽당 옆에는 김덕령 장군의 한(恨)이 서려 있는 취가정이 있다.

면앙 ‘송순’은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가리켜 한동(증암천)안에 세 명승이 있다고 하여 ‘일동지삼승(一洞支三勝)’이라 했다. 환벽당은 송순,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 등 당대의 석학들이 시·문을 논하던 곳으로 이 일대가 조선 시대 호남의 우수한 누정문화(樓亭文化)의 중심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역사·문화적으로 가치가 크다고 한다.

<환벽당>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호였으나 2013년 국가지정문화재 ‘대한민국 명승’ 제107호 광주 환벽당 일원으로 승격되었다.

환벽당 앞 정원  [사진=정성환 기자]
환벽당 앞 정원 [사진=정성환 기자]

환벽당 앞 정원 = ‘환벽당’은 송강 정철이 27세로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공부했다는 송강 정철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김윤제는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집 아래 ‘용소’에서 청룡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는데 잠을 깨고 확인해 보니 한 소년이 목욕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소년이 송강 정철이다.

김윤제는 이런 인연으로 정철을 환벽당에서 공부시키고 외손녀 사위로 삼았으며 1562년(명종 16)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출사할 때까지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취가정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  [사진=정성환 기자]
취가정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 [사진=정성환 기자]

취가정(醉歌亭) = 1890(고종 27년)에 ‘권필’이 꿈에 나타난 김덕령 장군과 시를 주고받았다는 설화에 근거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 의병의 총지휘관이었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혼을 위로하고 충정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김만식 등이 1890년(고종 27) 지었으나, 6·25전쟁으로 불에 타 없어져 1955년에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거실 앞면과 옆면이 모두 마루로 되어있다. 정자 안에는 설주 송운회가 ‘취가정’이라고 쓴 현판과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취시가’ 및 석주 권필의 ‘화답시’ 등 많은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에 4개의 주련이 부착돼 있다.

취가정으로 오르는 돌계단  [사진=정성환 기자]
취가정으로 오르는 돌계단 [사진=정성환 기자]

‘취가정’은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의 꿈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죽임을 당한 김덕령이 술에 취한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한 맺힌 노래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래주며, 권필 스스로 꿈에서 들은 것을 쓰고 답한 것이라고 한다.

취시가는 권필의 「석주집」 에 실려 있다. “몽득일소책(夢得一小冊)김덕령시집야”로 시작되는데, 이를 따서 ‘취가정’이라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의 기본소재는 김덕령 장군의 억울한 죽음이었으며, 석주 ‘권필’이 김덕령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분노하였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아무도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밝은 임금 받들고 싶다.”라는 구절은 반란군의 음모로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무죄를 말하지 않는 조정 대신들과 선조의 무능을 질타하며, 성군을 만나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한 맺힌 원한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 '취시가비'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공 김덕령 장군 '취시가비'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공 김덕령 장군 ‘취시가비’(忠壯公 金德齡 將軍 醉時歌 碑) 

「취시가」 - 김덕령 장군 -

취했을 때 노래하니 이 노래를 듣는 이 없구나.

나는 달과 꽃 사이에 취하기를 원치 않으며, 공훈을 세우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공훈을 세우는 것은 뜬구름과 같은 것이니, 꽃과 달 속에서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과 같도다.

취했을 때 노래하니 내 마음 알아줄 사람이 없구나.

다만 긴 칼을 잡고 어진 임금께 보은하기를 원하노라.

「화답시」 - 석주 권필 -

장군께서 옛날에 칼을 잡으시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인 것도 운명인 걸 어찌하랴.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을, 분명히 취했을 때 부른 한 곡조 노래구나.

* 석주 권필(1569~1612)은 선조 때 명망 있는 시인이었다. 정철의 제자로 1587년(선조20) 19세 때 과거를 보아 장원을 하였으나 임금에게 거슬리는 글자를 써넣어 합격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그의 누님이 살던 장성에 왔다가 김덕령을 의병장으로 추천한 해광 송제민의 딸과 결혼했다. 광해군 때는 시인으로서 명성이 자자한 의로운 선비였으나 1612년 광해군의 비 유씨의 아우 유희분 등 척족 세력의 부정부패를 궁류시(宮柳詩)로 풍자한 죄로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귀양 가는 도중, 장독으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선비였다.

'춘산곡' 시비 (광주광역시 사직공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춘산곡' 시비 (광주광역시 사직공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춘산곡」 시비 = 이 비는 1974년 광주광역시에서 세우고 김용구가 썼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고초를 받고 있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며 지은 춘산곡(春山曲)은 유언을 대신한 한(恨)이 서린 시조라 할 수 있다.

 

죽음을 앞둔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의연한 모습을 『선조수정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은 만 번 죽어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어머니 삼년상의 슬픔을 잊고 모자간의 정을 끊은 채 상복으로 바꿔 입고 칼을 차고 종군하였지만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해 충성도 펴지 못하고 불효만 하였습니다.

죄가 이러하니 신은 만 번 죽어도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충효(忠孝)만을 생각했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민중의 영웅이었지만 ‘춘산곡’에 담긴 충장공의 애통한 심정은 만백성의 슬픔이기도 했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충효 정신이 깃든 광주 충장로는 일제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군부 쿠데타세력의 권력침탈에 항거한 ‘5.18민주화운동’의 굴곡진 역사 속에 젊음과 낭만, 한(恨)이 공존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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